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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현판 병기 정도는 괜찮다”(?)…권력이 바꾼 광화문 [지금, 옛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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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구열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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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다. 이재명 대통령이 그렇게 규정했다. 지난 6일 국무회의에서였다. 옛날에도 그랬다. 늘 주목받았고, 관심은 컸다. 하지만 그것이 때로 광화문을 크게 망쳤다. 특히 권력의 필요, 섣부른 간섭이 작동할 때 그랬다.

 

경복궁은 광화문을 시작으로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으로 이어지는 정연한 구조를 가졌다. 서울관광재단
경복궁은 광화문을 시작으로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으로 이어지는 정연한 구조를 가졌다. 서울관광재단 

 

◆정문에서 동문으로…제자리를 빼앗기다

 

한반도를 장악한 일제는 ‘새로운 지배자’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하려 했다. 그래서 ‘옛 지배자’ 조선을 지우려 했다. 통치의 상징 궁궐이 타깃이었다. 그 중에서도 정궁(正宮)이자 법궁(法宮)인 경복궁 파괴에 골몰했다.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 공사.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 공사. 서울역사박물관

 

일제 통치 5년 간의 성과를 과시하겠다며 경복궁 남쪽 전각을 밀어내고 1915년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가 뚜렷한 시작이었다. 공진회를 끝낸 뒤에는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에 나섰다. 1916년 6월이다. 경복궁을 압도하는 크고 웅장한 건물을 세워 통치의 주체가 바뀌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존치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그대로 둘 경우 총독부 청사를 가리게 되는지라 일제가 그대로 둘 리 만무했다. 헐어 없앤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1922년 발표한 ‘사라지려 하는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은 이런 분노를 고스란히 담은 명문으로 유명하다. 광화문이 끝내 헐려 세상에서 사라질지라도 자신의 글을 통해 ‘불멸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결의가 매섭다.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려 하는 그대(광화문)의 짧은 운명을 바로잡을 만한 힘은 갖지 못했다. 그러나 영(靈)의 세계에서 나는 그대를 기필코 불멸의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이 글 속에서 그대를 불멸의 것으로 만들 자유만은 나에게 주어져 있다.…아아, 그대의 영이여, 갈 곳이 없거든 내게로 오라. 내가 죽거든 이 글 속에서 살아다오.”

 

반발여론에 철거는 힘들어졌고, 그대로 두자니 마뜩찮았던 일제는 광화문을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옆으로 옮겼다. 1926년이다. 그로부터 40년 넘게 경복궁의 정문-즉, 남문-인 광화문은 동쪽 담장에 서 있어야 했다. 제자리를 벗어나 본래의 용도를 잃어버린 채 옛 이름만 간직하고 긴 시간을 보낸 것이다.

 

◆“1000년은 갈 것”이란 허망함, ‘콘크리트 광화문’

 

1968년 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 준공식.
1968년 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 준공식.

 

엉뚱한 자리에 서 있던 광화문은 6·25 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는 사라지고, 석축만 남은 몰골로 한동안을 지내야 했다. 복원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60년대였다. 1967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복원계획이 나왔다. 광화문은 총독부 청사를 그대로 활용해 쓰고 있던 정부 중앙청의 앞으로 옮기게 됐다.

 

1968년 12월11일, 박정희가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이 열렸다. 남의 손에 뜯겨나가 엉뚱한 자리에서 보낸 세월이 수십 년이었다. 전쟁통에 파괴되어 흉물처럼 방치된 시간도 길었다. 경복궁의 정문이라는 정체성을 되찾고, 형태라도 얼추 갖추었으니 기뻐해야 마땅할 일이었다. 그러나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다. 목조건물인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복원했기 때문이다. 건축 재료가 나무에서 콘크리트로 바뀌면서 광화문은 나무 특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잃었다. 역사성과 예술적 특징이 사라진 콘크리트 광화문에 혹평이 쏟아졌다. 콘크리트 복원을 지시한 권력자의 서슬 퍼런 위세도 불만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시인 서정주는 “불쾌하다”고 꼬집었다. 한 건축가는 “문화재 복원은 아닌 셈이고 그저 광화문을 본뜬 하나의 콘크리트 모뉴먼트(기념물)로 봐져야 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박정희는 왜 콘크리트 복원을 고집했을까. 콘크리트를 산업화의 한 상징으로 여기던 당시의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 있다. “조국 근대화로 민족중흥을 실현하자”는 정권의 슬로건을 대변하는 하나의 기념물이었다는 해석이다.

 

해체 작업을 진행 중인 콘크리트 광화문.
해체 작업을 진행 중인 콘크리트 광화문.

 

박정희는 콘크리트로 지었으니 “1000년은 갈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헛된 바람이었다. 1977년 문화재관리국은 “앞으로 문화재의 보수 정화에는 콘크리트는 가능한 한 덜 쓰고 나무, 흙 등 옛날 그대로의 보수재료를 쓰는데 충실하겠다”는 의견을 모았다. 콘크리트 광화문은 2007년 해체됐다.

 

◆“한글현판, 한글의 가치를 떨어뜨릴 것“

 

이 대통령은 광화문 한글 현판과 관련해 광화문을 한국의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언급했다. “위대한 한글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광화문에서 볼 수가 없다”며 한자로 된 지금의 현판 아래 한글 현판을 함께 다는 방안을 말했다. 지켜보겠다고는 했지만 “병기 정도는 괜찮겠다”는 생각이었다.

 

전통건축에서 현판은 단순히 건물 명칭을 표시하는 간판이 아니다. 건물의 정체성과 위상을 드러낸다. 그 공간에 담긴 정신과 이념을 표현하는 상징적 장치이기도 하다. 광화문 현판은 경복궁의 정문이라는 위상, 국가적 상징성을 드러내며 ‘덕과 교화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고 백성을 이끈다’는 통치 이념을 담고 있다.

 

복원된 광화문 현판. 아래가 현재의 모습이다. 뉴스1
복원된 광화문 현판. 아래가 현재의 모습이다. 뉴스1

 

이런 중요성을 가졌기 때문에 광화문 현판 복원은 큰 관심을 끌었고, 그만큼 우여곡절을 겪었다.

 

1968년 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에는 박정희의 친필 한글 현판이 걸렸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노무현정부 시절 교체가 결정됐다. 글씨는 정조의 것으로 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하지만 정조 재위 당시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 빈터로만 남은 채였는데, 정조의 글씨로 하는 게 맞냐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흐지부지됐다. 논란 끝에 1865년 경복궁 중건 당시 공사 책임자였던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로 현판이 제작됐다. 하지만 석 달 만에 균열이 생기면서 부실 제작 논란이 제기됐다.

 

고증 논란도 이어졌다. 2010년 복원 당시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색 글씨를 썼다. 그러나 2016년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서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쓴 광화문 현판 사진(1893년 이전 촬영)이 공개됐다. 지금의 현판은 여기에 맞추어 제작하고, 2023년 10월 내건 것이다.

 

현판을 둘러싼 논란의 중심은 언제나 원형이었다. 누구의 글씨인지, 형태와 색깔이 어땠는지를 따지는 건 결국 원래의 것에 가장 가까운 현판을 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문화재 복원의 대전제가 원형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과정이다.

 

하지만 한글 현판을 달자는 주장은 여기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원형은 상관없이 지금의 필요와 시각에 따라 광화문을 바꾸자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반대 의견이 거센 이유다. 지난 3월 열린 광화문 현판 토론회에서 최종덕 전 국립문화유산연구소장은 “없었던 과거를 창조하는 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가 과거에 개입하고 옛 사람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홍석주 서일대 건축과 교수는 “한글 현판을 다는 순간, ‘원형에 최대한 가까운 복원’이라는 기준과 복원에 의한 성과물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글 현판이 오히려 한글의 가치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이강민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는 “한자 현판 아래 한글 현판을 덧붙이는 것은 단순한 발음기호의 표기에 불과하다. 한글의 주체적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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