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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기의시대정신] 어떤 일은 너무 쉽게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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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9-29 23:03:56 수정 : 2025-09-29 23: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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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봉투법 시행하고 보자식
대통령실 인식 안이하고 위험
법과 제도는 실험실 대상 아냐
수많은 삶과 직결돼 신중해야

40여년 전 모잠비크 북부의 바닷가 마을. 주민 수백명이 정체불명의 병으로 쓰러졌다. 몇 분 만에 다리가 마비됐고 심한 경우 눈까지 멀었다. 진찰을 마친 의사에게 시장이 물었다. “전염병입니까?” 의사는 답하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시장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전염병이 아니라면, 왜 선생 가족은 대피시켰습니까?”

시장은 “만약 전염병이라면 군에 연락해 도로를 차단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는 결단을 내렸다. “그게 좋겠습니다. 조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다음 날 오후, 그는 더 큰 참극을 마주했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시신들이 길가에 줄지어 놓여 있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어린아이의 시신을 옮기던 남자가 짧게 답했다. “오늘 아침, 버스가 끊겼다네요.” 생계를 위해 시내로 향하던 주민들은 갑자기 도로가 막히자 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낡은 배를 덮친 파도는 이날 수십명의 목숨을 삼켰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이 일화는 최근 한국을 찾은 빌 게이츠가 인생 책으로 꼽은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Factfulness)’에 실려 있다.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던 젊은 의사, 훗날 세계적 통계학자가 된 저자는 이 비극을 35년 동안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확신 없는 상황에서 “조치를 취하라”고 권했던 판단을 뼈아프게 후회하며, 끝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왜 마을에 이상한 병이 퍼졌던 걸까. 얼마 후 로슬링이 밝혀낸 원인은 놀랍게도 주민들이 평생 먹어온 카사바였다. 그해 흉작이 들어 정부가 이를 비싼 값에 사들이자 가난한 농민들은 가진 것을 모두 내다 팔았다. 그러고는 굶주린 나머지 밭에서 막 뽑은 카사바를 그대로 먹었다. 가공되지 않은 카사바의 독성이 주민들을 쓰러뜨린 것이다. 결국 전염병이 아니었다.

불행한 결과는 의외로 거대한 음모나 거창한 의사결정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순간의 망설임, 근거 없는 확신, 대충 넘긴 선택 같은 작은 판단에서 시작된다. “전염병일지 모른다”는 한마디가 마을을 봉쇄했고, 그 조치는 수십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순간의 결정이 증폭되며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세상의 많은 비극, 엄청난 참사가 얼마나 사소한 원인에서 비롯되는가를 떠올리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한 의사가 무겁게 털어놓은 이 고백은,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책임을 지는?때로는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하는?정치인의 판단이 지닌 무게를 돌아보게 한다. 1958년 중국 대약진운동 시기, 중국 지도부는 곡식을 축낸다는 이유로 참새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전국적인 소탕작전을 벌였다. 사람들은 냄비와 꽹과리를 두드려 참새가 지쳐 떨어질 때까지 날려 보냈고, 둥지를 허물어 알과 새끼까지 없앴다. 그러나 곧 예상치 못한 결과가 뒤따랐다. 천적이 사라지자 해충이 들끓었고 벼농사는 초토화됐다. 이어진 3년간의 대기근으로 수천만명이 아사했다. 사망자는 추정에 따라 1500만명에서 5500만명에 이른다. 결국 중국은 뒤늦게 소련에서 참새 수십만마리를 들여와야 했다.

정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판단과 결정을 쏟아낸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H-1B 비자 수수료를 100배 인상하겠다고 했다. 자국민 고용 확대라는 명분이지만, 이 조치가 수많은 이들의 삶을 어떻게 뒤흔들지, 미국의 장기적 경쟁력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 충분히 숙고되었는지 의문이다.

지난달 국회를 통과한 한국의 노란봉투법도 논란의 중심에 있다. 교섭 대상을 원청 기업까지 확대하고, 쟁의행위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조항으로 노동자 보호를 취지로 한다. 그러나 노사 갈등과 불법 파업, 경영 불확실성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안타까운 건, 이 같은 우려에 대한 대통령실의 반응이다. “일단 시행해 보고 문제가 생기면 고치면 된다”라니, 과연 그럴까.

1994년 캘리포니아의 삼진아웃법은 재범 억제를 내세웠지만, 경미한 절도범까지 종신형에 몰아넣는 과잉처벌을 낳았다. 결국 2012년 주민투표로 법이 개정돼 적용 대상을 중대한 범죄로만 한정했다. 한국 역시 2020년 전동킥보드 규제를 완화했다가 사고가 급증하자 불과 반년 만에 다시 면허 의무화로 되돌린 사례가 있다. 법은 문제가 생기면 고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이 불거진 혼란과 부작용, 삶을 잃고 목숨을 잃은 피해는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법과 제도는 실험실의 시뮬레이션이 아니다. 한 번 시행되면 곧장 수많은 사람의 삶과 생계에 직결된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정치윤리를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로 구분했다. 신념윤리가 의도의 순수성을 중시한다면, 책임윤리는 그 결정이 낳을 결과까지 감당할 것을 요구한다. 선의만으로 정당화되는 선택은 없다. 결과를 외면한 정치는 공허한 구호일 뿐이다. 베버는 정치인을 “권력 속에 도사린 악마적 힘(diabolische Machte)과 계약을 맺는 자”라고 했다. 권력이 가진 위험과 무게를 통렬히 직시하라는 경고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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