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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의우리건축톺아보기] 가을이 빚어낸 초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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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9-01 22:54:17 수정 : 2025-09-01 22:5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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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라면
추수 후 볏짚 쓴 초가집이 아닌
문화유산 지정된 기와집 연상돼
선입견에 싸여 과거 미화하는 듯

입추와 처서가 차례로 지나고 나니 날씨가 한결 선선해 더위가 한풀 꺾인 듯하다. 이제 가을인가 보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수확 중에도 으뜸은 추수,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추수한 나락을 탈곡해 곡식을 골라내고 나면 볏짚이 남는데 예전에는 이 볏짚이 온갖 요술을 다 부렸다. 볏짚은 농사의 으뜸 일꾼인 소의 여물을 끓일 때 꼭 들어가야 했고, 발을 보호하는 짚신을 삼는 데, 물건을 묶는 새끼를 꼬고 쌀을 넣고 보관하는 가마니를 짜는 데 꼭 필요했다. 무엇보다 볏짚은 초가지붕을 이는 이엉을 엮는 데 필요한 중요한 건축 재료였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의식주’라는 말마따나 집은 입고 먹는 것만큼이나 우리 삶에 중요한 것이니 예전에는 초가집에 꼭 필요한 짚이 곡식만큼이나 요긴한 물건이었다. 조선시대에 초가집은 가장 보편적인 살림집의 한 형태였다. 많은 돈이 드는 기와집은 극히 예외적인 것이라 백성에게 존엄을 보일 필요가 있었던 궁궐이나 관아, 그리고 부처를 모시던 사찰에서나 지었다.

정조 때 수원에 화성을 짓고 그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화성 건설을 위해 수원의 남리와 북리 지역 민가를 헐고 보상한 기록이 있는데 초가집이 47채, 흙방이 15개, 기와집이 3채였다. 이 중 기와집 3채는 각각 그 규모가 5칸으로 혜전(鞋廛), 미전(米廛), 유문전(楢文廛)이었다. 혜전은 가죽신, 짚신, 버선 등을 팔던 신발 가게이고, 미전은 쌀가게, 유문전은 책, 서화, 종이, 붓, 먹, 벼루 등을 취급하던 요즘의 서점과 갤러리, 문구점을 합친 가게였다. 살림집은 모두 초가집이나 흙방이었다. 초가집은 그 규모가 2~32칸으로 다양했는데 10칸 이상인 집이 13채나 되었다. 이에 비해 1~3칸 규모였던 흙방은 1칸짜리가 과반이 넘는 아주 작은 집이었다. 이를 통해 일반 백성의 살림집은 대체로 초가집이었고 최하층민의 잠자리가 흙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와집 3채가 모두 가게인 점도 흥미로운데 고객의 이목을 끌고 고급스러운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 안팎을 유달리 꾸미는 요즘 상점과 닮은 꼴이다. 보상액을 보면, 5칸 초가집은 25냥인데 비해 5칸 기와집은 75냥으로 3배가 많았다. 2칸 초가집의 보상액은 10냥으로 2칸 흙방의 2냥 5전보다 4배나 많았으니, 기와집과 초가집 그리고 흙방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기와집은 지붕이 무거워 상대적으로 지붕이 가벼운 초가집보다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는 서까래부터 보와 기둥에 이르기까지 하부구조를 짓기 위해 굵은 목재가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굵은 목재로 집을 지으려면 이를 짜 맞출 수 있는 솜씨 있는 목수가 필요하고 기와를 굽고 이는 것 역시 특별한 솜씨를 가진 장인만이 할 수 있었으니 기와집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초가집은 가벼운 초가지붕을 받치면 되었기에 기와집 같은 굵은 목재가 필요 없어 가까운 산에서 필요한 목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가는 목재로 집을 짓는 일은 굳이 목수가 아니더라도 조금만 눈썰미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설사 목수를 쓴다고 해도 기와집에 비해 품삯이 훨씬 쌌다. 게다가 볏짚은 추수해 탈곡하고 나면 사방에 널려 있었으니 구하기 쉬웠고 그 시절 짚으로 이엉을 엮고 이를 지붕에 이는 일은 마을 사람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어서 마을 사람끼리 서로 품앗이만 하면 굳이 장인을 쓸 필요가 없었다. 집 짓는 비용이 기와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창덕궁 후원 옥류천 지역에 ‘청의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초가집이다. 옥류천 지역에는 청의정 외에도 소요정, 취한정, 태극정, 농산정 이렇게 4채의 정자가 더 있어 부재의 굵기를 한눈에 비교해 볼 수 있다. 청의정의 기둥과 보, 서까래 등이 주변의 다른 정자들의 부재에 비해 매우 가늘다. 초가지붕이 가벼워 그 정도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흙방은 구들을 깐 흙바닥에 흙으로 벽을 쌓은 다음 그 위에 나뭇가지를 걸치고 이엉을 덮어 지붕을 만든 집으로 도배를 안 했다. 당시 종이가 매우 비싸 흙방에 살 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도배할 엄두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초가집 또한 도배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사용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흙방은 청동기시대 움집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비바람을 피하고 하늘만 가린 가장 원초적인 집이었다. 흙방은 어쩌면 청동기시대 움집에 구들만 추가된 채 조선까지 전승된 형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에게 생소하기만 한 흙방에 살았던 가구(家口)가 초가집의 3분의 1이나 있었으니 당시 ‘찢어지게 가난했던’ 하층민들의 살림살이가 눈앞에 선하다.

그런데 요즘은 ‘한옥’이라 하면 흙방은 물론이고 조선시대에 가장 보편적이었던 초가집은 온데간데없고 우리는 으레 기와집을 떠올리고 있으니 어떻게 된 까닭일까.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축물이 하나같이 기와집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당시의 살림집을 보여주기 위해 지정된 이른바 ‘민속문화유산’도 대부분 기와집인데 내구성이 약한 초가집이나 흙방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을 관리하다 보면 본래 초가집인 것도 소유주가 기와집으로 바꿔 달라는 민원에 시달리기도 한다. 초가집에 살았다고 하면 자기 조상이 신분 낮은 사람으로 여겨질까 봐 걱정한다. 그러나 사실은 조선시대 대부분의 백성은 초가집에 살았다. 기와집은 요즘으로 치면 예외적으로 지어졌던 호화 주택이었다. 한옥이라고 하면 기와집을 떠올리는 우리 시대의 선입견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문화유산 대부분이 기와집인 것이 자칫 과거를 미화하고 결과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돈이 모든 것을 규정하는 요즘 세태 때문인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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