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중 반미’ 이미지 탈색하며 첫발
‘실용’ 앞세우며 홍보하기보다는
차분한 국익 행보로 내실 다지길
이재명정부의 외교 노선은 ‘실용’이다.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통해 글로벌 경제·안보환경 대전환의 위기를 국익 극대화의 기회로 만들겠다”고 천명한 뒤 액션 플랜까지 공개했다. ‘굳건한 한·미동맹을 토대로 한·미·일 협력을 다지고, 주변국 관계도 국익과 실용의 관점에서 접근하겠다’는 것이다. 미·일 등 자유진영 국가들에 치우쳤던 윤석열정부의 ‘가치 외교’와는 차별화된 접근이고, ‘죽창가’를 외치고 한·중 관계 복원에 힘썼던 문재인정부와도 결이 다르다. 미·중 패권 경쟁 와중에 미국 트럼프 2기의 ‘미국 우선주의’는 더 거친 양상을 띠고 있다. 안보와 통상을 둘러싼 이런 대외 환경의 변화가 새 정부의 외교 기조를 실용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야당 시절 ‘친중, 반미, 반일’ 성향의 지도자로 인식됐다. ‘미군은 점령군’, ‘중국에도 대만에도 셰셰(謝謝·고맙다)’, ‘일본은 적성 국가’ 같은 발언이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없지 않다. 트럼프의 귀를 잡고 있는 주변의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세력은 이런 이미지를 증폭시켰다. 한 마가 인사는 한·미 정상회담 직전 미국 언론에 ‘한국의 반미 대통령이 워싱턴에 온다’는 제하의 기고를 했다. 이 대통령은 미·일 순방을 계기로 반전(反轉)의 행보로 ‘친중, 반미, 반일’ 이미지를 탈색시켰다. 일본에는 이전 보수 정부가 타결한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배상 관련 합의를 계승하겠다는 선물을 안겼다. 미국에 가서는 기존의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노선에서 탈피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미국의 “경제와 안보를 이원화하려는 시도는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피터 헤그세스 국방장관)는 발언에 화답했다.

과거 진보 진영은 위안부, 강제징용 합의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 정부가 추진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결사반대했다. 보수 정부였다면 진보 세력은 이번 순방도 ‘매국 외교’로 규탄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의 달라진 실용 행보로 우리가 대일, 대미 외교에서 균형감을 회복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도 생존이 걸린 외교·안보 현안만큼은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전에 이명박 대통령도 ‘실용 외교’를 기치로 내걸고 취임했지만 임기 말 지지율이 하락하자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하는 깜짝 이벤트를 연출했다. 그 여파로 한·일 관계는 악화했고 독도가 분쟁 지역이라는 일본 측 논리만 강화됐다. 실용과는 거리가 먼 행보였다.
북한의 ‘2국가론’ 천명 이후 남북관계 개선과 북한 비핵화는 난제 중의 난제가 됐다. 지금으로선 한국이 운전자는커녕 조수석에도 앉기 힘든 실정이다. 이 대통령이 ‘피스 메이커(peace maker)’ 역할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맡기고 자신은 ‘페이스 메이커(pace maker)’에 만족하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이 북한을 ‘가난하고 사나운 이웃’에 비유하며 북한을 자극한 것은 적절치 않았다. 대중 관계도 고려해서 ‘안미경중’ 기조 변경은 미국 측에 비공식적으로 전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좀 더 전략적이고 섬세한 메시지 관리가 필요하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자유주의 세계질서’가 훼손되면서 세계는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해가고 있다. 국익을 중심에 두고 현실적 관점에서 실용적 외교를 구사해야 할 시점이지만, 정부가 스스로 ‘실용 외교’라고 홍보하는 건 적절치 않다. ‘실용’이란 용어엔 단기적 실익을 따지고 상황에 따라 태도를 달리할 수 있다는 부정적 뜻도 담겼다. 외교사에서 미국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미·중 수교는 실용 외교의 대표 사례로 거론되지만, 당시 수교 협상을 진행했던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닉슨 외교가 실용 외교로 규정되는 것을 경계했다. 이 용어가 현실주의적 기반 위에서 장기적 전략 목표를 추구한 닉슨 외교의 본질을 축소한다고 봤다. 전직 외교부 장관은 “장미는 장미로 부르지 않아도 장미”라며 “이재명정부가 실용적 외교를 하면 되지 굳이 실용 외교라고 말하며 오해를 살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경청할 만한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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