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위협 직시… 국가 전략 변화 추구

지난달 18일 국제무대에서 보기 드문 진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오벌오피스 집무실을 상징하는 ‘레졸루트 데스크’에 자리 잡고, 유럽 지도자들이 옹기종기 책상을 둘러싸고 앉은 모습이었다. 트럼프 ‘선생님’을 유럽연합을 대표하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을 비롯하여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핀란드, 우크라이나 6개국 정상과 나토 사무총장이 ‘학생’처럼 에워싼 사진이 세계에 널리 퍼졌다.
트럼프의 과대망상에 아부하는 백악관 홍보부서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트럼프 대장을 유럽 졸개들이 경청’하는 그림이니 말이다. 영국의 일부 언론은 이 사진은 유럽의 쇠퇴를 상징한다며 자학적 해석을 덧붙였고, 미국을 떠받들고 유럽을 깎아내리는 데 열심인 일부 한국 언론도 이를 받았다. 망해가는 유럽이 막강한 미국 앞에 무릎이라도 꿇었다는 투였다. 그러나 한 컷의 사진은 순간의 반영일 뿐이다.
백악관 진풍경의 진정 감동적인 부분은 유럽 정상들이 집단으로 미국을 방문한 배경이다. 이들의 목표는 단 하나,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 2월처럼 미국에서 처참한 홀대와 망신을 당하지 않도록 힘을 실어 돕자는 의도였다. 특히 8월15일 트럼프와 푸틴의 알래스카 정상회담 직후 젤렌스키의 미국 방문이었던 만큼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부당한 요구를 강제로 밀어붙이지 못하도록 방지하자는 의지가 강했다.
이어 8월27일에는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 폴란드의 도날트 투스크 총리가 단체로 몰도바를 방문해 오는 9월23일로 예정된 총선에서 친유럽 민주주의 집권당을 지지해 달라고 국민에게 부탁하고 나섰다. 이들은 “유럽의 심장이 여기서 뛰고 있다”며 “러시아가 다시 돌아와 여러분의 미래를 앗아가도록 두지 말라”라고 강조했다. 몰도바는 우크라이나 인접국으로 러시아의 위협과 공작이 치밀하게 이뤄지는 상황인 데다 9월 선거에서 친러시아 권위주의 세력의 집권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몰도바 방문에 앞서 올 5월10일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폴란드의 정상이 함께 밤 기차를 타고 키이우로 들어가 우크라이나 민주주의에 지지를 표명하면서 러시아에 당장 휴전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 같은 ‘집단 공동 정상외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특별한 지정학적 위기가 유럽에서 만들어낸 새로운 관습이다. 2022년 6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 이탈리아 마리오 드라기 총리, 루마니아 클라우스 요하니스 대통령이 단체로 키이우를 방문한 사건이 그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유럽이 망했다고 손가락질하거나 비웃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유럽은 적어도 러시아의 위협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기존 국가 전략의 변화를 추구하는 중이고, 홀로 역부족임을 깨달으면 힘을 합칠 줄 안다. 러시아가 독립한 이웃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폭력으로 국경을 바꾸려 들면 거리가 먼 프랑스나 영국, 심지어 극우가 집권하는 이탈리아도 큰 비용을 들이면서 정상이 몸소 달려들어 돕고 나선다. 이들은 무엇보다 법과 원칙이 지배하는 국제질서에 대한 신념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이를 위해 유럽의 목소리를 만들려고 한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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