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간 '기사도에서 테러리즘까지'(삼인 펴냄)는 전쟁의 역사를 통해 남성성(masculinity)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 본다.
저자인 리오 브로디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교수는 폭넓은 학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유럽과 미국의 전쟁사를 가로지르며 남성성, 남성 정체성에 대한 근대적 전제들이 어떻게 형성돼 왔는지 살펴본다.
"힘 좋은 공장 노동자보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샌님 쪽이 직장을 얻고 가족을 부양하기 훨씬 쉬울 때 남성성이란 무엇이겠는가?"라고 반문하는 저자는 역사적으로 '남자다운' '남성적인' 것의 정의는 당대의 지배적인 사회 문화적 요구에 따라 변해 왔다고 말한다.
남성 동성애자가 적과 싸우는데 필수적인 남성적 자질이 부족하다는 현재의 시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19세기와 20세기 유럽에서 형성돼 있던 관념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달랐다. 기원전 4세기 동성 연인들로만 구성된 고대 그리스의 '테반 성단'의 전사들은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에게 격퇴당하기 전까지 그리스의 자랑거리였다.
심지어 14세기 초 성전 기사단이 불경죄와 동성애 혐의로 해산됐을 때에도 동성애 때문에 이들이 전사로서 부적격하거나 무능하다고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전사로서 탁월하다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그러한 박해의 표적이 된 이유였다.
저자는 남성성을 규정하고,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으로 '전쟁'을 제시한다.
"남성성은 주로 극단적 상황에서 규정되며 전쟁이야말로 그러한 극단성이 가장 두드러지고 자연스러워지는 상황이다."
고대 세계에서 전쟁은 남성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통과의례로 간주됐다. 전쟁의 시련을 이겨낸 자만이 전사이자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고대 영웅들의 전설은 중세 기사와 기사도에 대한 숭배로 옮겨갔다. 갑옷을 입고 출격해 용과 싸우고 아리따운 아가씨를 구출하는 중세 기사들의 영웅담은 기사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근대 들어 남성성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남성성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기술의 발전과 이에 따른 전쟁 양상의 변화다.
라이플총, 기관총, 가시철사 등 전쟁 기술의 발전은 기존의 도덕적이고 명예에 기반을 둔 전쟁과 남성성의 결합을 일거에 허물어뜨린다. 신무기를 경멸하고 명예를 중시하는 남성 전사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일부 남성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남성성을 규정하는 것이 더는 전쟁만이 아니라는 인식이 대두하기 시작한다.
"유럽 사회가 더욱 복잡해져 중세의 '싸우는 자, 기도하는 자, 일하는 자'라는 분류를 넘어 훨씬 복잡한 남성적인 직업, 행동 양식, 성격 유형 등이 만들어지면서 남성성을 오로지 군사적 위업하고만 연결짓는 핵심 전제가 서서히 부식되기 시작했다."
종교도 '초월적인 전사 남성성'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했다.
중세 기독교를 비롯해 일본의 신도(神道), 이슬람교는 모두 전장에서 죽은 자들에게 천국을 약속했다.
중세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서 롤랑을 비롯한 전사들의 영혼은 천사들에게 안겨 천국을 향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신도의 승려들은 자살 특공 부대인 가미카제의 영광을 찬양했으며 최근 일부 이슬람교도 성직자들은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들에게 천국을 약속한다.
저자는 "종교는 이처럼 영원이라는 수단을 통해 가변적이고 상충하는 양태로 가득한 미궁 속에서 초월적인 전사 남성상을 빚어내고 개인적 명예를 집단적 명예로 변모시킨다"고 분석한다.
888쪽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이 부담스럽지만, 남성성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에 관심 있는 사람은 물론 일반 독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책이다.
김지선 옮김. 888쪽. 3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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