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사로 김일성과 회담… DJ납치사건 등 주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지난달 31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에 따르면 그는 지난 5월 노환으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이 전 부장의 일생은 권력의 무상함을 절감케 한다. 그만큼 그의 삶은 권력의 영광과 오욕, 부상과 침몰로 얼룩져 있다. 그는 압축적 산업성장기이자 정치암흑기인 ‘유신시대’를 대표하는 권력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은밀한 정치공작을 기획, 실행한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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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1월 남북조절위원회의 참석차 방북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가운데). 오른쪽은 당시 대통령 외교담당특보였던 최규하 전 대통령. 연합뉴스 |
196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은 3선 개헌 ‘후폭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를 주일본 대사로 내보냈으나 그는 1970년 12월 제6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면서 권부 핵심으로 복귀했다. 이어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총지휘, 명실상부한 ‘정권의 2인자’로 발돋움했다.
중정부장 재임 기간인 1972년 5월엔 ‘대북 밀사’로 평양에 파견돼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과 사상 첫 남북비밀회담을 가졌고 ‘7·4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당시 회담에서 김 주석은 “민족의 분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동포끼리 이처럼 만나고 보니 반갑고 감개무량하다”면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부장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하는 등 유신의 ‘어두운 역사’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1998년 6월8일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1973년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 전 부장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이 전 부장은 1973년 12월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박정희 후계자는 이후락”이라고 밝혀 파문을 일으킨 소위 ‘윤필용 사건’으로 중정부장에서 해임됐다. 1978년 제10대 총선에서 자신의 고향인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돼 정계로 진출했으나 1980년 5공화국 출범 당시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경기 하남에서 도자기를 구으며 은둔생활을 해왔다.
유족은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 등 3남1녀. 빈소는 동서신의학병원 장례식장, 장지는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결정됐다. 발인은 2일 오전 8시30분. (02)440-8922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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