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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생 서강대 교수·국제문화교육원장 |
나는 일곱 살과 여덟 살에 걸친 내 생애의 2년을 조부모님 슬하에서 보냈다. 할아버지의 새벽 퉁소소리에 잠을 깼으며,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자연과 더불어 뛰어다녔다. 여덟 살이 되면서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내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경상도 사투리를 잘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급장이 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나중에 어른들한테 전해들은 이야기지 나의 오리지널 기억은 아니다. 어쨌든 나의 유년 시절은 평화스러웠고 아늑했다.
나의 좋은 시절은 2학년이 되면서 부모님이 사시던 서울 집에 합류하게 되면서 끝이 났다. 4남매 사이에서 좁은 공간을 놓고 경쟁해야 했으며, 생선이나 고기반찬이라도 나오는 날이면 밥상에서도 열띤 경쟁을 벌여야 했다. 어디 그뿐이랴. 내가 전학한 서울 혜화초등학교 2학년에는 모두 18개 반이 있었는데 한 반의 학생 수가 거의 100명이었다. 시골학교에서 전교 1, 2 등을 하던 나의 서울 입성 첫 성적은 반에서 30등이었다. 그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는데 그건 남과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숨 막히게 전개되던 공부와의 전쟁에서 해방된 순간이 한번 있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복싱의 정신조 선수가 당당히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것이다. 온 나라가 정 선수의 메달 소식에 기뻐했지만 우리 학교는 더욱 특별했다. 정 선수가 바로 혜화초등학교 졸업생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학생을 명문 중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이 학교의 명성과 전통을 생각하면 이례적일 정도로 학교 전체가 들썩였다. 공부가 아니라도 온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된 몇몇 친구들은 복싱을 시작했고 학교는 농구부를 만들어 학생들의 열기에 화답했다.
그 은메달의 가치가 요즘 많이 떨어진 것 같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투혼을 발휘해 은메달을 딴 왕기춘 선수나 양궁 개인전에서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은메달을 딴 박성현, 박경모 선수의 고개 숙인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올림픽 경기는 모두 경쟁 종목이고 치열한 순위 다툼을 벌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운도 상당히 작용하고 심판이나 관중의 태도 또한 경기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므로 자칫 한 순간에 4년간 흘린 피땀이 물거품이 되기 쉽다. 그러니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다는 것은 금, 은, 동을 막론하고 똑같이 값진 것이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색깔을 가리지 않고 전체 메달 집계로 국가별 순위를 매기고 있다. 우리도 이제는 올림픽 경기 입상자들에게 주어지는 연금 등에 있어서 색깔의 차별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경쟁이 주요한 사회조직의 원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해도 인간승리의 기록인 올림픽 경기까지 그래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허구생 서강대 교수·국제문화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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