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자부 "문제는 인정하지만 법 개정할 수 없어" 서울 A구 보건소에서 20년째 근무 중인 의사 B씨(52)는 요즘 ‘재계약’이라는 말만 생각해도 분통이 터진다. 오는 12월 재계약을 앞둔 그에게 보건소 측이 최근 규정에 따라 ‘재계약은 신규 임용에 해당된다’며 임금을 1년차 연봉으로 대폭 삭감하겠다고 알려왔다. 깎이는 연봉 규모는 3000만원이나 된다.
2005년 재계약 때 연봉이 2500만원 줄어든 의사 C씨(47·부산D보건소)는 참다 못해 아예 이직을 고려 중이다. C씨는 “17년을 일하며 보건소에서 청춘을 바쳤는데 왜 이 일을 했나 싶고, 보건소에서 일한 게 후회된다”며 한숨을 쉬었다.
서울 서초보건소에 근무하던 이모(39·여)씨는 올 2월 재계약했으나 1000만원가량 연봉이 삭감됐다. 이씨는 최근 자존심도 상하고 근무 의욕도 떨어져 사직서를 냈다. 이씨는 친한 선배와 함께 개업할 예정이다.
서민들이 애용하는 공공의료기관인 보건소의 의사들이 속속 이직하고 있다. 원인은 정부가 2004년 11월 개정한 ‘지방계약직공무원규정’ 때문이다. 정부는 당시 ‘전문직’이던 보건소 의사를 ‘지방계약직’으로 편입해 계약기간을 최장 5년으로 정하고, 이 기간이 지나면 재계약하더라도 신규 임용으로 간주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이에 따라 보건소 의사들은 수십년 동안 근무했더라도 연봉 재계약과 동시에 하루아침에 ‘계약직 1년차’ 로 전락해 연봉이 대폭 삭감되는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는 3년마다 재계약했지만 호봉도 계속 올랐다. 이처럼 계약조건이 열악하다 보니 보건소는 이제 기피 근무처가 되고 있다. 그나마 버티던 의사들도 계약 만료와 함께 하나 둘 현장을 떠나는 실정이다.
1일 보건소와 지자체 등에 따르면 2006년 말 현재 전국 251개 보건소에서 근무하는 의사는 모두 820명으로 최소 인력배치 기준에서 89명(의사 54명, 치과의사 35명)이 모자란다.
서울 종로구 보건소는 지난해 결원이 발생했지만 지원자가 없어 세 차례 채용공고를 내 겨우 충원했다. 서울 강북구 보건소도 지난 4월30일 채용 공고를 냈으나 지원자가 없어 최근 3차 공고를 냈다. 다른 대부분의 보건소도 상황은 비슷하다. 강북구 보건소 관계자는 “지원자가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대한의사협회가 지난해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공공의료 의사의 72.2%가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낮은 급여를 꼽았다. 또 보건소 의사 57.1%가 2∼4년 사이에 이직을 계획하고 있다고 대답한 것을 감안하면 재계약 규정은 보건소 인력 수급을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상황은 보건소 의료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실제 보건행정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3년 이상 4년 미만’이라고 응답한 의사들이 30.9%로 가장 많아 재계약 규정은 의사들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시점에서 보건소를 떠나게 만드는 주요인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건강세상네트워트 강주성 대표는 “지역 주민과 일상적으로 접하는 보건소 특성상 주민과 의사 사이에 신뢰 관계가 형성돼야 효과가 극대화된다”며 “잦은 의료진 교체는 지역 주민의 건강권을 위협할 위험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김행선 변호사는 “특정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계약직과 일상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보건소 의사들을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의료기술이 우수하고 근무실적이 좋은 계약직 의사의 경우 5년을 초과해 임용하거나 신규 임용으로 채용하더라도 보수 특약을 허용해 기존 연봉을 어느 정도 감안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행자부는 관련 규정을 개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문제가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특정 집단을 위해 전체 공무원 조직을 희생시키고 예산을 낭비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장원주 기자 stru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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