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90년, 바빌론에 힐키야의 딸이자 요하힘의 아내인 수산나가 살고 있었다. 수산나는 아름다운 용모와 함께 신앙심 또한 깊었다. 어느 날 백성들의 원로이면서 재판관인 두 노인은 숲 속에서 목욕하는 수산나를 훔쳐보다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수산나를 범하려 했다. 하지만 수산나는 죽을 각오로 순결을 지켜냈다. 앙심을 품은 두 노인은 오히려 수산나가 젊은 청년과 간통했다며 법정에 고소하는 모략을 꾀했다. 재판은 수산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 수산나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이때 성령은 다니엘이라는 소년에게 두 노인을 신문하도록 했다. 다니엘은 두 노인에게 각각 “수산나와 청년이 어디서 관계하였는가?” 묻자, 한 노인은 “상수리나무 아래”, 다른 노인은 “보리수 아래”라고 대답했다. 위증이 탄로나 두 노인은 돌에 맞아 죽고, 수산나는 무죄로 석방돼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림은 이 중 두 노인이 목욕하는 수산나를 훔쳐보는 장면을 그렸는데, 수산나의 순결함을 돋보이게 하고 노인들의 음흉함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가 돼 있다. 수산나는 편안한 자태로 발을 샘에 담그고 앉아 있다. 그러나 노인들은 참으로 불편하고 옹색한 자세로 그녀를 훔쳐보려 안간힘을 쓴다.
수산나의 백옥같이 하얀 피부와 귀한 장신구는 그녀의 순결함과 고귀함을 상징한다. 반면 검붉은 색으로 덧칠된 노인들의 피부색과 얼굴은 관음증과 범죄의 어두운 느낌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순결한 여인을 범하고 남의 여자를 탐하는 것은 신의 계율을 어기는 못된 짓이니 당장 그만두라는 것. 당대나 지금이나 진리는 변함없으니 현대의 사람들도 그림을 보고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우리의 양심이 너무 나태해져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다윗은 영웅으로만 기억될뿐더러 조지 해리슨의 아내에게 사랑가를 바친 에릭 클랩튼을 낭만적인 가수로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뭔가 깨닫게 하는 이야기를 하나 읽었다. 시골 사는 중년 부부의 이야기다. 남편이 장날을 맞아 읍내에 다녀올 때마다 매일 아내를 구박했는데, 세련된 읍내 여인과 달리 자신의 아내가 너무 촌스럽고 못나 보였기 때문이다. 남편의 불평을 견디다 못한 아내는 ‘그렇게 내가 보기 싫으면 친정에 가 있겠다’고 선언했다. 모처럼의 친정 나들이니 목욕도 하고 화장도 하고 나서는데, 그만 그 모습이 선녀 같아 남편이 치맛자락을 붙들고 ‘농담도 못해?’라며 겸연쩍게 웃었단다.
아름답고 세련된 남의 사람에의 욕심을 접고, 정작 자신의 소중한 사람에게 욕심을 내 본 적이 언제였던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내가 욕심을 내지 않는 순간, 그 소중한 내 사람은 빛을 잃고 이름을 잃는다. 남의 아내 말고, 자신의 아내, 자신의 애인을 탐하는 남성들이 더 많아지기를. 그리하여 세상 모든 여인이 고귀해지기를 희망한다.
심형보 바람성형외과 원장(www.breast.co.kr)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