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보하려는 마음에서
아프리카의 중서부에서는 심야에 버스를 잘 운행하지 않는다. 전쟁 상황은 아니더라도 강도들이 도로 한가운데에 통나무나 바위로 길을 막아 놓고 있다가 차가 정지하면 승객 전체를 터는 일이 가끔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 거리를 이동할 때는 시간을 넉넉히 잡고 움직인다. 그러나 차들이 워낙 노후해서 한 시간을 가다가 두 시간 동안 고치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보면 지도상에 나와 있지도 않은 마을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근처에 여인숙이라도 있으면 그곳에 머물지만 대개 차 안에서 새우잠을 잔다. 아니 새우잠이라기보다는 3인석에 4∼5명이 앉아 있으니 껴서 잔다는 말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때는 불편하지만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을 자주 겪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비좁은 공간에서도 자기 자리를 조금이라도 양보하려는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잠을 자고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데서 그들과 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이 어느 정도 없어질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많은 것들이 보이고
이방인이라는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면 너와 내가 구별되는 여러 장벽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도 한다. 언어의 한계마저도 느낌으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베냉의 코토누에서 니제르의 니아메로 갈 때 그런 경험을 했다. 베냉의 국경을 넘은 지 삼십분쯤 됐을까 한 여인이 차를 세웠다. 파란 색 바탕에 달팽이꽃(?)이 새겨진 옷을 곱게 차려입고, 머리에는 옛날 동전을 주렁주렁 단 여인이 버스에 올랐다. 승객들 대부분이 남자라서 그런지 그녀에게 관심이 쏠렸다. 그녀는 가발에 달려 있는 동전 하나를 풀더니 운전기사에게 주려고 했다. 그때 기사는 픽 웃었고 사람들은 크게 웃었다. 난 어리둥절했다. 왜 그녀가 동전을 내밀었고 다른 승객들이 웃었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여자가 내민 동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기사에게 돈을 주었다. 그 남자가 그녀의 차비를 대신 내준 것이다. 나는 그 상황을 남자의 눈을 보고 알아차렸다.
# 의미는 꼬리를 물고
넉넉한 사람들이야 청동이나 금으로 된 장신구를 사용하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플라스틱 구슬이나 못쓰게 돼서 버려지는 물건들, 특히 옛날 동전을 가지고 몸을 치장한다. 버스에서 만난 여자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없는 살림에 동전을 하나둘씩 떼어서 사용하다 보면 친구나 남편에게서 받은 추억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남자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내린 다음에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프리카에서 목걸이나 팔찌는 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이외에 사회적, 종교적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문득 도고에서 구한 에웨(Ewe)족의 팔찌가 생각났다. 팔기를 못내 아쉬워했던 마음이 보인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는 그 팔찌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분명 어떤 비밀이 있을 것 같았다. 하루는 갤러리 일을 도와주던 학생이 팔찌에 조각되어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의 배꼽이 없다고 하면서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배꼽이 있는 것은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여자, 즉 그 팔찌의 주인공이고, 배꼽이 없는 것은 그녀를 지켜주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게끔 하는 삼신할머니 같은 조상신이 아니냐며….
# 이유의 밑바닥이 보이고
현실적인 필요에서, 때로는 주술적인 목적으로 착용했던 그녀의 팔찌에는 삶의 애환과 소망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녀 한 사람만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손에서 손으로 대물리면서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런 세월의 흐름과 추억이 담겨 있으니 팔찌를 넘기는 마음이 오죽했으랴. 그때 도고에서 같이 구한 베냉의 바리바(Barriba)족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장신구 장식이 많은 것은 어쩌면 사연의 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조각을 구했을 때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나이지리아와 접한 베냉의 북쪽 지역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면 그 중 한 명을 죽인다고 하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종족에 따라 쌍둥이에 대한 의식이 다르지만, 바리바족은 동물의 사악한 기운이 들어갔다고 해서 한 명을 제물로 바친다. 제물로 바쳐지는 사람은 여자이거나 나중에 태어난 동생이다. 어쩌면 한국의 경우도 아주 오래전에 이런 풍습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바리바족은 죽은 아이를 위해서 인형을 만들고, 살아 있는 아이가 커 가면서 행하는 의식을 같이 치른다는 것이다. 조각에 장식되어 있는 목걸이나 팔찌 그리고 허리띠 같은 것이 바로 살아 있는 아이의 성년식이나 결혼식 때 받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의문을 가졌다. 왜 그들은 죽은 아이의 조각을 만들어서 장신구를 달아주었을까?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 하나로 연결되고 있음을
바리바족은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 점에서 죽은 아이를 위해서 만들어진 조각은 살아있는 아이가 가지고 노는 인형이 되기도 하지만, 위험과 고통으로부터 방어하는 보호신이 되기도 한다. 조각에 장신구들을 달아주는 행위도 어떻게 보면 죽은 자가 영적인 세계에서 형이나 오빠를 잘 보살펴 달라는 부모의 뇌물(?)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아프리카의 장신구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시키는 고리라는 점에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정신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부적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죽어 있는 자에게도 영적인 순화를 거듭하게 하지만….
에웨족의 팔찌에 새겨진 배꼽 없는 사람과 바리바족의 인형 조각에 배꼽이 없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갤러리아프리카로 대표·철학박사
◇쌍둥이로 태어난 베냉의 바리바족 아이들은 외출할 때 꼭 인형 조각을 가지고 다닌다. 그 이유는 먼저 죽은 동생이나 누이가 살아 있는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보호신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갤러리아프리카로 소장〉
◇의식을 행할 때 쓰는 도고의 에웨족 팔찌에는 두 사람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팔찌가 단순히 외적 아름다움을 장식하는 것 이외에 인간 존재의 목적이 신적 세계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갤러리아프리카로 소장〉
◇마사이족 여자들은 다섯 살 무렵이면 장신구 만드는 법을 배운다. 그녀들은 자신이 만든 목걸이나 팔찌를 마음의 정표로 건네기까지 손끝에서 많은 보고픔과 바람들을 날마다 태어나게 한다.<사진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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