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 9월 7일까지 열리는 ''다리를 도둑맞은 남자와 30개의 눈''이라는 기획전에 출품된 작품들이다. 이 전시의 부제로 명명된 ''사진에 옷을 입히는 남자 고초와 30인의 한국 패션사진전''에서 보듯, 이 전시에는 고초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국의 사진작가 30명이 상업성과 예술성의 중간지대에서 고투를 벌인 흥미로운 패션사진들을 함께 내놓았다. 자본주의의 첨단 전도사로 군림하는 광고, 그 중에서도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을 담아내는 패션사진이 순수성을 고집하는 미술관 벽에 걸린다는 사실은 대단히 이채롭다.
그러나 다양한 종류의 패션사진에는 이미 그 시대의 모든 문화적 코드가 내재돼 있다. 사진을 찍는 작가들은 나름의 예술성을 주문받은 상업성에 용해시키기 위해 자존심을 건다. 대중은 미술관에 걸린 순수 작품들보다도 패션사진의 화보에 더 익숙해져 있다. 광고사진은 미술관이라는 우아한 성채에 진입하는 순간, 일상에서 접하는 흔하디흔한 화보와는 맥락이 달라진다. 관람객들은 미술관에서 자신이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던 광고사진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일상성의 친숙함이 깨지면서 우리 시대의 문화적 속성을 진지하게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대림미술관이 고상한 품위에 집착하지 않고 순수예술과 대중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범박한 일상의 예술적 승화를 위해 이 전시를 기획한 이유다.
사진작가 한홍일이 찍은 구치 광고사진 하나를 들여다보자. 여인은 벗은 상반신을 드러낸 채 꽃잎이 떠 있는 연못 속에 엎드려 있다. 여인의 머리칼 위쪽으로는 싱싱한 초록의 이파리가 드리워져 있고, 여인의 하체에는 착 달라붙은 고아한 무늬의 치마가 걸쳐 있다. 물빛은 검정이고 여인의 관능적인 젖가슴은 물속에 보일 듯 말 듯 감추어진 상태다. 아무도 이 사진에서 광고를 느낄 수는 없다. 자본주의 시대의 첨단 욕망을 부채질하는 광고사진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홍일의 사진은 용하게도 이미지가 목적이자 수단인 작품이다. 서정적인 배경과 싱싱한 생명력의 관능이 살아 숨쉰다. 예술인가 하면 광고사진이고, 광고인가 하면 예술이다. 이 애매한 작품이 미술관 벽에 걸리면 그 애매함은 단번에 제거된다. 한홍일 외에도 김중만 구본창 정용선 박경일 김동률 김현성의 작품들은 사진에서 광고문구만 빼면 21세기 문화적 코드로 무장한 빼어난 작품들이다.
다시 프랑스에 날아온 고초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고초는 사진작가가 아니라 개념미술가다. 그의 친구인 세계적인 사진작가 넨 골딘이 그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는 구치의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로도 활약했는데, 어느 날 우편엽서의 인물사진에다 옷을 입혀주다가 상상력이 발동됐다. 골딘의 사진 중에서 열다섯 점을 골라, 그 사진에 입힐 옷을 디자이너들에게 부탁했다. 그 결과 순수예술과 패션을 넘나들면서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독특한 작업을 성사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수균 대림미술관 학예실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패션사진과 예술을 중재해줄 수 있는 많은 작가들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패션도 발전하고, 광고계도 수준을 높이고, 대중도 예술에 가까워질 수 있는, 자본의 이익만을 좇는 세상을 잠시 속일 수 있는, 그런 중간지대에 대한 바람 때문이다. /조용호기자 jhoy@segye.com
<사진>한홍일, ''구찌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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