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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묻은 총구’ 어떻게 내려놨나

입력 : 2014-11-04 19:21:44 수정 : 2014-11-04 19: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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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평화 새 시대를 연다] 서로의 입장 이해 신뢰형성 … 美지원도 한몫 “고지대를 향해 올라가며 몹시도 빽빽하고 위험한 정글을 헤쳐나가는 복잡한 트레킹 같았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자신의 자서전 ‘여정’에서 1997∼1998년 성 금요일 협정 체결 과정을 돌아보며 남긴 말이다. 당사자 간 감정의 골이 너무 깊었기에 협상은 험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피 묻은) 더러운 손을 맞잡았다”는 비판을 감수하고 대화를 택했다. 유혈충돌로 얼룩진 분쟁을 평화적으로 관리할 초석을 다졌다는 점에서 분단된 한반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구교 양측이 서로를 향해 겨누던 총구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배경으로 가장 먼저 꼽히는 것이 ‘모호성’이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데다 양측 내부 강경파와 온건파 간 온도차도 컸기에 이들은 무장 해제 문제와 같은 민감한 쟁점들은 모호함의 영역에 남겨뒀다. 당시 협상에 깊숙이 관여했던 조너선 파월 전 총리 비서실장은 “만약 무장 해제 문제를 협상장에서 해결하려고 고집했다면 논의가 3년은 더 걸렸을 것”이라며 “대신 우리는 양측이 서로 달리 해석할 수 있는 표현으로 합의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통합파는 협정문을 ‘민족파 강경세력인 신페인당이 연정에 참여하려면 먼저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무장 해제를 해야 한다’고 이해했고, 반면 민족파는 ‘IRA가 무장 해제를 하기 전에 통합파가 권력을 공유할 의지가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모호함은 향후 타협과 절충의 여지를 만들어 양 진영 온건파가 강경파를 설득할 시간을 벌어줬다.

물론 모호함이 언제까지고 지속할 수는 없다. 블레어 전 총리는 2002년 10월 IRA의 무장 해제 불이행으로 협상이 삐걱거리자 벨파스트 연설을 통해 “‘창의적 모호함’은 초기 단계의 수많은 교착상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됐지만 이제는 ‘완료 행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평화협상의 자체 동력이 생긴 만큼 이제는 총과 투표용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한 압박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런 복잡한 협상일수록 ‘제 3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당시 회담 특사로 의장을 맡았던 조지 미첼 전 미국 상원의원은 중립적인 위치를 견지하며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신·구교 양측 모두의 신뢰를 얻었다. 파월은 최근 언론 기고문에서 “미첼의 인내와 유머가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협정에 서명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아일랜드계인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측면 지원도 협상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꼽힌다.

유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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