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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시를 기다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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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8-14 22:15:52 수정 : 2025-08-14 22: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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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중에는 CBS 라디오의 음악방송을 듣는다. 집에서 김포시민회관까지 승용차로 1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여서 방송 프로그램이 하나 바뀐다. 날씨에 따라 선곡도 달라지니 꽤 즐거운 길이다. 어떤 날은 소나기가 쏟아져서 시야 확보도 쉽지 않은데, 천둥까지 치면 진행자의 음성과 음악이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김포 가는 길이 설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음악은 내게 시의 예열로 안성맞춤인 셈이다.

음악의 여운을 이어받는 것은 김포시민회관 진입로의 훤칠한 메타세쿼이아 길이다. 주차장 또한 인심 좋게 넉넉하다. 먼 길이니 적어도 30분 이상 일찍 도착해서 차 안에서 꼬무락거리거나 거리를 산책한다. 강의는 오후 7시부터다. 김포문인협회 주관인 김포문예대학 시 심화반 강의를 두 시간 진행한다. 35명을 정원으로 하는 수업이다. 10분 전쯤 강의실에 들어가서 일찌감치 와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눈다. 언제나 환대하는 분들, 다양한 직업과 연령층, 그러나 미소만큼은 한결같은 분들이다.

천수호 시인

그런데 이곳은 대학 강의실과 분위기가 다르다. 대학생들은 뒷좌석을 선호한다면 여기는 앞자리가 먼저 찬다. 밤인데도 조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청년처럼 젊은 호기심과 풋사과 같은 겸손으로 눈빛을 반짝인다. 질문을 던지면 답변도 적극적이고 반응도 활발하다. 더 놀라운 건 등단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미 시인이라면 이런 강의쯤이야 지나칠 것도 같은데, 이들은 여전히 다양한 시를 읽고 객관적인 시선을 파악하려 애쓴다. 뿐만 아니라 자기 타이틀에 안주하지 않고, 시에 대한 열정도 놓지 않는다.

자주 시를 제출하는 분들도 있다. 세 분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모두 ‘정순’이다. 그들은 한 주 내내 시만 생각한다고 고백한다. 밤을 새워 퇴고하고 긴장하며 시를 합평받는다. 합평 시간이면 하얀 얼굴에 홍조를 띠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쉰이 넘은 그녀들을 자꾸 놀리고 싶어진다. 필사 노트가 두껍고 빽빽하다. 누구보다 상상력은 풍부하지만 직장 생활과 병행하다 보니 퇴고 시간이 부족해 보여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예전에 내가 문학상 심사의 최종심에서 떨어뜨렸다는 분도 지금은 시인이 되어 노련한 시를 쓴다. 이렇듯 시의 인연은 끊어졌다가 다시 닿는 묘한 매력도 있다.

무엇보다 고마운 분은 발전하는 분이다. 4월부터 강의를 시작했으니 벌써 만 넉 달을 꽉 채웠다. 그동안 시가 성큼 자라서 몰라볼 만큼 달라진 분도 있다. 얼마나 시에 몰입했을까. 또 얼마나 시에 애정을 쏟았을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참 놀랍고 신기하다. 그러나 아직 시를 본인의 컴퓨터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불편한 분도 있으리라. 굳이 내보이지 않으면 어떠랴. 이미 그들 마음속에 다정한 시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시를 읽는 마음만으로 충분히 취한 시간이다.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땅을 향해 그대 몸을 구부러뜨리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쉴 새 없이 취해야 한다.//그러나 무엇에?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에나 그대 좋을 대로 아무튼”(샤를 보들레르의 ‘취하라’ 부분 인용) 보들레르의 이 시는 어떤 것에 몰입해 있을 때 우리는 시간의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보들레르의 말대로 시에 취한 그들은 시간의 무서운 짐을 전혀 느끼지 않는 듯 보인다. 한결같이 미소가 젊고 수줍다. 이들의 삶에서 시에 대한 이런 집중은 행복한 도취의 시간이다.

꼭 시가 아니어도 좋다. 몰입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 자체로 삶이 즐거워지지 않을까. 돌아오는 길은 차가 막히지 않으니 50분이 걸린다. 여전히 CBS 음악방송을 듣는다. 늦은 밤이어서 진행자의 음성이 차분해져 있다. 시를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와 나도 사뭇 달라져서 누군가 찔러 넣어준 사탕 하나를 입에 문다. 달콤한 시간이 지났으니 스스로 당을 처방해야 한다.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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