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아일랜드공화국이 1949년 영연방에서 독립했지만 얼스터 지역의 6개주(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았다. 갈등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구교도들이 1969년 북아일랜드 최대 도시 벨파스트에서 참정권과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유혈폭동이 발생, 9명이 숨지고 200여명이 다쳤다. 이는 독립을 주장하는 구교 민족파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반체제 테러활동, 영연방 잔류를 희망하는 신교 통합파 ‘얼스터방위군’(UDA)의 대항이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1998년 ‘성 금요일 협정’(벨파스트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0년간의 ‘암흑기’(the Troubles) 동안 약 3500명이 희생되는 폭력적 갈등이 지속됐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종교·민족·지역 간 대립, 식민지배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 사회경제적 격차 등이 얽히고설켜 복잡한 성격을 띤다. 1969년 유혈사태 이후 벨파스트에는 아예 신·구교도 거주지역을 가르는 장벽이 세워졌다. 6개월간 한시적 용도로 세워진 벽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높아졌다. 벽면에는 서로를 향한 불신과 증오의 낙서가 새겨졌다. 최장 5㎞에 달하는 담장 99개는 한반도 비무장지대(DMZ)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벽’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분쟁 해결의 초석을 놓은 벨파스트 협정에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 북아일랜드 내 신·구교 8개 정파가 합의하기까지 숱한 고통과 인내, 협상이 필요했다. 1970년대에 시작된 평화의 노력은 30년 가까이 지나서야 결실을 봤다. 그 사이 휴전과 협정 파기가 반복된 것은 양측 강경파들도 오랜 분쟁에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했다. 민족파 내부에서도 서서히 무력투쟁에 대한 회의감이 번져가던 1997년, 갓 정권을 잡은 토니 블레어 총리는 약 7개월의 시한을 못박아 놓고 협상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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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오른쪽)이 2012년 6월 벨파스트에서 마틴 맥기니스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부총리를 처음으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영국 왕실의 상징적 존재이자 아일랜드공화국군(IRA)에 의해 사촌을 잃었던 엘리자베스 2세와 북아일랜드 독립투쟁을 이끈 IRA 사령관 출신 맥기니스의 만남을 두고 언론들은 “피로 얼룩진 과거사의 종식을 의미하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협정 이행 과정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양측은 IRA 등 준군사조직의 무장 해제, 정치범 석방, 경찰과 법무부의 구성 문제 등을 놓고 번번이 갈등을 겪었고 한때 영국 직접통치가 재개됐다. ‘오렌지 공’ 윌리엄 3세가 구교도인 제임스 2세를 물리친 7월12일을 기념해 신교도들이 벌이는 ‘오렌지 행진’은 여전히 구교 지역을 가로지르며 충돌을 촉발했다. 양측 극단주의 강경파의 테러활동은 여전히 간헐적으로 일어나 평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하지만 벨파스트 협정은 북아일랜드 유권자 71.2%, 아일랜드 국민 94.39%의 찬성으로 국민투표를 통과한 터. 다수가 강력히 원하는 평화의 흐름이 조성되면서 적어도 원점 이전으로 후퇴하지는 않았다. 블레어 총리는 1998년 8월 오마 지역에서 발생한 IRA의 폭탄 테러로 29명이 사망해 협상이 중대 갈림길에 섰을 때를 회고하며 “협상 참여자들은 방해에 굴복하지 않기를 원했고, 이는 협상을 더욱 신속하게 진전시키는 전환점이 됐다”고 말했다.
성과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행진위원회가 구성돼 양측 행진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고, 양 진영이 치안과 관련한 합의에도 도달했다. 2005년에는 IRA가 무장 해제를 선언했다. 신·구교도 간 사회경제적 격차가 엄존하고 있었던 만큼 북아일랜드는 각종 차별의 완화·해소를 위해 평등효과 평가를 진행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해에는 양측 증오의 상징과도 같았던 평화의 벽을 허물겠다는 계획이 발표됐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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