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청년들 힙한 에너지에 열광
더불어 살아가는 가치 새삼 발견
옛것이 건네는 나지막한 당부다
44년 전 영화 ‘블레이드 러너’ 속 미래 지구에는 행성 간 비행체가 오가고, 인간과 구분할 수 없는 레플리컨트(복제인간)가 돌아다닌다. 그런데 추적추적 비 내리는 밤, 허름한 포장마차도 불을 밝히고 있다. 오래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 포장마차가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번쩍거리는 저 먼 미래쯤이면 낡은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말아주는 노인도, 그곳을 찾는 발길도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지금은 감독의 혜안에 감탄한다. 리들리 스콧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시대의 변화라는 게 단순히 선형적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인공지능(AI) 기술 진보의 소란 속에서 자꾸만 옛것들이 고개를 든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청동방울과 청화백자가 스무 살 청년들의 놀이가 됐다. 대학가에는 불교 굿즈 팝업스토어가 열린다. ‘중생아 사랑해’, ‘많은관심보살’이라니. 발랄한 말장난 너머 청년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는 수행의 철학도 있다. ‘힙불교’, ‘힙트래디셔널’이란다. 종이책 열풍은 ‘텍스트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과와 수제 양갱, 퓨전 떡은 ‘할매니얼’ 세대의 가장 핫한 디저트다.
언젠가부터 강남의 빌딩 숲 대신 강북의 노포와 고궁 담벼락으로 청년들과 외국인 관광객이 몰린다. 노란 조명을 밝힌 익선동 한옥과 서순라길의 고즈넉한 돌담, 밤마다 돈화문로를 후끈 채우는 야장 거리. 영국 매체 타임아웃(Time Out)은 ‘2026년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동네’ 1위로 종로3가를 꼽았다. 고단한 노인들의 쉼터로만 여겨졌던 ‘그 종로3가’가 가장 트렌디한 문화 거점으로 변신했다. 어디 종로뿐일까. 쇳가루 날리는 문래동 철공소 옆에는 근사한 카페가 들어서고, 피란민들이 모여 만든 해방촌 신흥시장에서 청년 창업자들이 꿈을 건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한국만의 풍경이 아니다. 한국 청년들이 불상과 단청 굿즈에 열광하는 동안, 유럽과 미국 Z세대의 ‘핫플’로는 가톨릭 성당이 떠오르고 있다. 라틴어 미사와 그레고리오 성가가 소셜미디어를 타고 번진다. 뉴욕 센트럴파크에선 묵주 기도를 하며 걷는 이른바 ‘홀리 걸 워크(Holy Girl Walk)’ 모임이 인기다. 맨해튼의 주요 성당에선 자리가 부족해 발코니 계단이나 벽에 기대 미사를 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종교 인구 감소로 수많은 성당이 문을 닫는다는 기사가 잇따랐는데 말이다.
대중음악 시장에도 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빌보드 차트는 봄부터 컨트리 음악이 수성 중이다. 신예 컨트리 싱어 엘라 랭글리의 ‘추진 텍사스(Choosin’ Texas)’다. 10월3일자 핫 100 차트에서 통산 24주 1위에 오르며 빌보드 역사상 최장기 1위 곡으로 등극했다. 무려 머라이어 케리의 메가 히트 캐럴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22주)를 넘어선 기록이다. 투박한 기타 선율과 함께 테네시와 텍사스라는 컨트리 성지를 배경으로 하는 노랫말, 흙먼지 날리는 도로와 픽업트럭, 카우보이모자 등 장르의 상징으로 꽉꽉 채운 곡이다. ‘추진 텍사스’ 외에도 2위와 3위 곡까지 모두 컨트리가 휩쓸고 있다.
백년 전 미국 애팔래치아산맥의 소박한 음악이, 천년 전 성당을 채운 고요한 묵상이, 반세기 전 한국 근현대의 그을음이 밴 골목과 박물관에서 지난한 세월을 견딘 문화재가 지금 가장 젊은 세대와 만나고 있다. 스마트폰을 쥐고 자라난 첫 세대가 보여주는 이 어리둥절한 아이러니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소셜미디어라는 무대에서 늘 남과 다른 ‘새로움’을 소비하려는 청년들의 표피적 유행일 수도 있겠다. 오래된 것이 이들에게는 가장 새로운 것일 테니까. 하지만 현상을 줌아웃해 보면 매끈한 디지털 자극에 지친 현대인의 초상이 보인다. 무한히 복제되는 가상세계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진짜 삶의 질감, 기술 복제 시대에 잃어버린 아우라(Aura)를 향한 본능적인 회귀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저서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는 ‘과거는 비참했고 기술 발전은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는 통념에 의문을 던진다. 저자는 1970년대 히말라야 북부 라다크에 머물며, 자연의 속도와 순환에 맞춰 살아가던 전통사회가 개발이 밀려들면서 경쟁과 불안, 환경 파괴, 공동체의 균열을 겪는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미래’ 앞에 ‘오래된’을 붙인 제목의 역설은 우리 미래의 단서가 이미 지나온 시간, 우리가 버리고 온 오래된 삶의 궤적 속에 새겨져 있음을 암시한다. 지난여름 그 히말라야에서 우리는 보았다. 문명의 열기에 무너진 설산이 고요했던 삶의 터전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던 광경을. AI 개발의 최전선에 섰던 이들마저 속도의 위험을 경고하는 요즘, ‘오래된 미래’의 질문을 되짚지 않을 수 없다.
첨단과 효율만을 향해 달려온 시대가 비로소 숨을 고르며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종이책을 넘기고, 오래된 맛과 소리에 마음을 기울이고, 천년 된 사찰과 성당을 찾는 걸음에서 우리는 복제할 수 없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긴 시간을 견뎌낸 것, 함께 살아가는 것의 가치를 새삼 발견한다. 앞만 보며 달려온 우리의 어깨를, 과거의 온기가 가만히 붙들어 세운다. 멈추어 돌아보고 그곳에서 다시 내일을 살아가라는, 오래된 것들이 건네는 나지막한 당부다.
김동기 강원대 초빙교수·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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