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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거, "韓 독립시켜야" 카이로선언 밑거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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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4-20 13:21:19 수정 : 2022-04-20 13:21:18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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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9일은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
기념사업회·윤주경 의원, 21일 국회서 토론회
장제스, "中 100만 대군도 못한 일 해내" 극찬
서울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동상.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 고위 군인과 외교관 등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청년이 해냈다.”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32년 4월 29일 매헌 윤봉길 의사가 폭탄 투척으로 일본군 장성 등 7명을 처단한 직후 장제스 당시 중국 국민당 주석이 내놓은 반응이다. 그날 의거 현장에 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크게 다친 일본 외교관 시게미쓰 마모루(1887∼1957)는 훗날 외무상이 되어 1945년 일본을 대표해 연합국에 항복하는 치욕적인 역할을 떠맡는다. 시게미쓰의 항복문서 조인을 참관한 9개 연합국 중 비록 한국은 없었으나, 윤 의사의 ‘혼(魂)’이 일본의 패망을 지켜본 셈이다.  

 

사단법인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회장 명노승)은 윤 의사의 중국 상하이 의거 90주년을 앞두고 21일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 기념 대토론회’를 연다고 20일 밝혔다. 윤 의사의 손녀인 윤주경 국민의힘 국회의원, 윤 의사의 뜻을 기리는 단체인 매헌월진회가 공동 주최자로 나선다.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윤 의사는 구한말인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는 이미 일제강점기였고 윤 의사는 보통학교 2학년이던 1919년 3·1만세운동을 목격한 뒤 일본식 교육을 거부하며 학교에서 자퇴했다. 이후 오치서숙에 들어가 사서삼경과 신학문을 익히고 야학과 농촌 계몽운동을 전개하며 민족의식을 일깨우다가 23세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선 일왕의 생일 축하식 겸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경축식이 열렸다. 윤 의사는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져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 대장 등 7명을 처단했다. 이는 전 세계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 침체되었던 국내외 항일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서두에 소개한 것처럼 중국의 장제스 주석은 “우리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청년이 해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했다.

 

1943년 11월 연합국 수뇌부의 카이로회담 모습. 왼쪽부터 중국의 장제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영국의 윈스턴 처칠. 세계일보 자료사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을 상대로 싸우던 연합국들은 윤 의사의 상하이 의거 11년 뒤인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처음 일제 패망 후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합의한다. 장제스 주석이 회담에서 이를 강력히 제안하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도 선뜻 동의했다. 윤 의사의 용기있는 행동이 연합국들을 움직여 카이로선언으로 이어진 것이다.

 

윤 의사는 일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육군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25세에 순국했다. 윤 의사의 유해는 1946년 서울 용산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고,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장관 시게미쓰 마모루(오른쪽)가 고개를 숙인 채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있다. 시게미쓰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 때 다리를 다쳐 평생 의족과 지팡이에 의존했다. 왼쪽은 연합군 총사령관인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세계일보 자료사진

비록 윤 의사는 광복을 못 보고 눈을 감았으나 일본은 그로부터 10여년 후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 앞바다에 정박한 미국 해군 전함 ‘미주리’호(號)에서 열린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에는 패망한 일본을 대표해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상이 참석했다. 몸이 불편한 그는 지팡이에 의존해 절룩거리며 이동했는데 이는 윤 의사의 상하이 의거와 관련이 있다. 당시 현장에 있다가 크게 다친 시게미쓰는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비록 일본의 항복을 받은 미국·영국 등 9개 연합국 대표단 속에 한국 대표는 없었지만, 상하이 의거로 상징되는 윤 의사의 혼이 미주리호 함상에서 고개 숙여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시게미쓰의 모습을 똑똑히 지켜본 셈이다.

 

이번 토론회는 한시준 독립기념관 관장(단국대 사학과 명예교수)이 좌장을 맡는다. 매헌연구원장인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 장석흥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가 각각 ‘상해 의거의 역사적 의의와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윤봉길이 꿈꿔왔던 대한민국에서 평화의 의미’를 주제로 발표한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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