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은 일상생활에서 도장을 즐겨 쓴다. 도장은 개인이나 직책 또는 단체의 이름을 새겨 찍도록 만든 도구로, 인장(印章)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은 빨간 인주를 묻힌 도장을 공적·사적 문서에 찍어, 그 책임과 권위를 증명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어린이는 ‘손가락 걸고 약속’할 때 약속→도장→복사→코팅의 절차를 거친다. ‘도장 찍기’ 문화가 한국사회에 자리 잡고 있다.
도장의 역사는 매우 길다.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고사(檀君故事)에 “환인(桓因)이 그 아들 환웅(桓雄)에게 천하를 다스리고 인간세상(人世)을 구하게 함에 있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청동기시대에 인장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도장을 사용하였다는 근거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없다. 중국과 일본 등에서도 오래전부터 도장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도장 문화가 딱히 우리만의 전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에는 도장이 의외로 많이 찍혀 있다.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보면 ‘한국은행총재’라는 글자가 적힌 네모 도장이 인쇄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주민증록증에는 ‘??시장인’, ‘??군수인’ 또는 ‘??구청장인’이라고 적힌 도장이 인쇄되어 있다. 여권에는 ‘외교부장관인’이라는 도장이 인쇄되어 있고, 운전면허증에는 ‘??지방경찰청장인’이라는 도장이 인쇄되어 있다. 즉, 한국에서 도장은 관공서 발급 증명서라는 권위를 입증하는 기능을 한다.
도장은 공공 영역뿐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도 널리 쓰인다. 계약서, 동의서, 은행 통장, 증명서, 상장, 표창장, 임명장 등에도 도장이 빠지지 않는다. 2012년 ‘인감증명’을 대신해 ‘서명’을 사용할 수 있는 ‘본인서명사실확인제’를 도입하였지만, 여전히 도장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

도장은 권위와 신빙성을 담보하는 물건으로, 위조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해 왔다. 하지만, 오늘날 도장이 복제 불가능한 물건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장을 하나 또는 여러 개 마련하여 일일이 찍기도 하지만, ‘도장을 스캔한 전자파일’을 사용하여 ‘전자결재’를 하기도 하고, 아예 ‘도장이 인쇄된 서식’을 이용하기도 한다.
지폐, 주민등록증, 여권, 운전면허증 등에 포함된 ‘인쇄된 도장’은 제품 디자인의 한 부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없더라도 책임과 권위의 상실이 생기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 여권에는 각각 ‘외교부장관’, ‘일본국외무대신’이라는 관인이 인쇄되어 있지만, 미국·중국·북한 여권에는 그런 것이 없다.
또한, 한국뿐 아니라 주요 선진국에서는 이미 도장 또는 서명을 대신하는 전자결재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러나 일본은 보안성이 높고 오랫동안 써왔다는 이유로 도장 문화를 고수해왔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지난 7일 일본 정부규제개혁추진회의에서 서면과 날인(捺印) 중심으로 이뤄지는 모든 행정절차를 근본적으로 손보라고 지시했다. 민간 부문에서도 법에 따라 서면·도장·대면으로 해야 하는 것을 가급적 빨리 폐지하도록 유도할 것이라 한다.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금융이나 상거래를 할 때 거래 당사자가 본인임을 증명하는 공인인증서 역시 도장과 같은 기능을 수행해 왔지만, 곧 폐기될 것이다. 경로의존성에 기댄 관료적 형식주의는 개혁 대상일 뿐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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