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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최수봉 의사 독립의 꿈 키운 의열단… 옛터는 빌딩숲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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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7-21 21:29:22 수정 : 2016-07-21 21: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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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유도회 경남 밀양지부 상남면지회는 지난 8일 상남면 마산리 최수봉 의사 기적비 앞에서 추모제를 열었다. 이날은 경남 밀양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최수봉 의사 순국 95주기가 되는 날이다. 지역 유도회 회원과 주민들은 매년 이날을 잊지 않고 의사의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의사는 1894년 밀양에서 태어나 동화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일제의 강압으로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1912년 동래 범어사에 있던 명정학원으로 전학했다. 1913년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중퇴했다. 

독립투쟁단체인 의열단이 조직된 중국 지린성 지린시 광화로 57호 일대. 최수봉 의사(작은 사진)는 이곳에서 폭탄제조법을 배워 밀양경찰서를 공격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1919년 밀양 장날 만세시위를 지도하면서 의사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서게 됐다. 이 만세시위로 인해 일제의 수배를 받게 되자 그 길로 만주로 망명했다. 그리고 지린에 있던 의열단을 찾아갔다. 의열단은 가장 대표적인 독립투쟁단체로 1919년 3·1운동 이후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에 의해 설립됐다.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지린성 바후먼 밖 중국인 반씨객점에 모인 독립지사들은 밤을 새워 가면서 숙의한 끝에 다음날인 10일 새벽에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 결성 초기에는 단장으로 추대된 김원봉과 이종암·윤세주·강세우 등 13명이 참가했다.

의사는 당시 24세의 나이로 의열단에 들어가 폭탄제조법 등을 배웠다. 의열단 단원 고인덕으로부터 폭약과 폭탄제조기를 전달 받아 산 속에서 폭탄을 제조했다. 그리고 밀양으로 돌아와 기회를 엿보던 중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사건 소식을 듣고 거사를 도모하기로 결심했다.

의사는 자신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유한 김상윤으로부터 대구에 있던 김원석을 소개받았다. 김원석은 의사에게 독립운동의 기세를 올리기 위해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고, 일본 경찰관을 응징할 것을 지시했다.

1920년 12월 27일 오전 7시30분 의사는 폭탄 2개를 가슴에 품고 밀양경찰서에 찾아갔다. 때마침 이 시간에는 밀양경찰서 서장실에서 전 직원이 모여 와타나베 서장의 훈시를 듣고 있었다. 첫 번째 폭탄은 순사부장의 어깨를 맞고 탁자 위에 떨어졌으나 불발됐다. 이어 두 번째 폭탄은 현관 쪽에 떨어져 힘이 약한 탓에 기둥 일부를 폭파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뒤쫓아 온 일본 경찰을 피해 도주하던 의사는 민가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길이 막혀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자 품고 있던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을 시도했다.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돼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1921년 4월 16일 사형을 언도받은 의사는 같은 해 7월 8일 오후 3시 대구형무소 교수대에서 순국했다.

의사가 찾아가 폭탄제조법을 배웠던 의열단이 조직된 곳은 중국 지린성 지린시 광화로 57호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허름한 객주였으나 지금은 도심 번화가로 바뀌어 고층빌딩이 들어서 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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