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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사랑으로… 쉰 잔치를 시작하다

입력 : 2013-04-05 18:18:31 수정 : 2013-04-05 18: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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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시인 최영미, 다섯 번째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
"돼지 3대가 지배하는 이상한 외투의 나라…"
북한 정권 세습 통렬히 비판
최씨 "지금은 열애 중" 핵심 주제 '사랑'을 읊다
1990년대에 대학에 다닌 독자는 최영미(52) 시인의 이름이 반가울 것이다. 19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는 도발적인 제목만큼 우리 사회와 문단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막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없어진 상황에서 그의 시가 “철없는 운동권 학생들아, 이제 정신 차리고 공부나 하라”는 권고처럼 들린 탓이다. 그래선지 50만부라는 경이적인 판매 기록에도 불구하고 최씨는 진보 성향이 강한 문단에서 평가와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동안 1980년대에 관한 글은 아예 쓰지 않았습니다. 80년대라는 말만 들어도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와요.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백기완 민중후보 캠프에서 뛰며 못 볼 것을 참 많이 봤거든요. 지난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를 둘러싼 논란을 보며 ‘1987년부터 느껴 온 (진보 진영의) 문제점이 결국 드러났구나’라고 생각했죠.”

최씨가 최근 펴낸 다섯 번째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실천문학사)은 김일성-정일-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3대 세습을 통렬히 비판한 작품으로 출간과 동시에 화제가 됐다. 요즘처럼 남북관계가 험악한 때 시인이 북한의 ‘타격’ 목표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다.

“할아버지도 돼지./ 아버지도 돼지./ 손자도 돼지.// 돼지 3대가 지배하는 이상한 외투의 나라.// 꽃 속에 파묻힌 아버지를 보며/ 꼬마 돼지가 눈물을 흘린다/ 돼지가 울자/ 농장의 모든 동물들이 통곡한다.”(‘돼지의 죽음’ 중에서)

최씨는 북한 정권을 풍자할 목적으로 쓴 시임을 선선히 인정했다. 그는 “김정일이 사망하던 날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며 “사망 뉴스를 같이 본 뒤 어머니 기분을 풀어드리려고 한 농담이 그대로 시가 됐다”고 설명했다.

봄 기운이 완연한 가운데 화사한 원피스 차림으로 기자들과 만난 최영미 시인은 “그동안 일부러 다루지 않았던 1980년대를 배경으로 새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며 “80년대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아닌 나 개인의 기억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이처럼 정치적 성향이 짙은 작품도 있지만 사실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사랑’이다. 현재 열애 중이라는 최씨는 “사랑을 해봤으니 사랑에 관한 시를 쓸 수 있다. 나는 글로 사기를 못 친다”며 웃었다. 연애 상대를 묻자 “내 나이 또래의 한국 남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의 저녁이 너의 저녁과 합해져/ 너의 욕망이 나의 밤을 뒤흔들고// 뜨거움이 차가움을 밀어내고/ 나란히 누운, 우리는// 같이 있으면 잠을 못 자./ 곁에 없으면 잠이 안 와.”(‘연인’ 중에서)

불면증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시인의 말을 빌리면 “나를 가장 잘 표현한 시”다. 마침 시인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연애를 하면 잠이 잘 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 푸념하는 최씨를 보니 딱 봄처녀 같다. 서른에 “잔치는 끝났다”고 선언한 시인은 쉰 넘어 새 잔치판을 벌이고 있다.

글·사진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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