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모르는 내게도 90년대는 80년대와 달랐습니다. 무엇을 하건 어정쩡하고 무엇을 꿈꾸건 너절했으니 그게 바로 90년대. 80년대가 격렬했다면 90년대는 야비했습니다. 80년대가 야생마 같았다면 90년대는 그늘에 숨은 고양이 같았습니다.”(32쪽)
21세기를 앞두고 20세기 끝자락에서 고뇌했던 이들 ‘90년대 학번’들의 풍속도가 인간관계의 본질에 천착해온 소설가 한차현(41)씨에 의해 ‘사랑, 그 녀석’(열림원)이라는 장편소설로 복원됐다.
한씨는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인터넷 교보문고에 연재된 이 소설에서 ‘90년대 학번’들의 사랑을 거대한 시대와 쉽지 않은 일상 사이에 풀어놓는다. 서사가 화려하지 않지만 오히려 살갑게 다가오는 건 그의 경험이 오롯이 녹아 있기 때문일 터. 실제 ‘한차현’이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소설 속 연인 문은원도 아내 문은씨를 토대로 탄생했으며, 대다수 등장 인물도 실제를 바탕으로 재구성됐다.
90학번이자 빨리 37세나 43세 정도로 건너뛰길 바라던 차현은 연상의 학교 선배 미림과 만나 종로5가의 한일극장, 종로3가의 단성사 등을 전전하며 데이트를 즐긴다. 하지만 차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림에게서 이별 통고를 받고 대학 문창반 동기 은원을 불러내 괴로움을 토로한다.
술을 잔뜩 마신 차현은 갑자기 은원과 뽀뽀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고 술김에 은원에게 ‘뽀뽀’를 요구한다. 은원은 차현을 달래려고 이에 응하지만, 예상치 못한 뽀뽀를 계기로 새 인연을 만들어간다. 두 사람은 춘천으로, 대전으로 여행하고 차현이 입대하기 직전 잠자리까지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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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장편소설 ‘사랑, 그 녀석’에서 ‘90년대 학번’들의 사랑 얘기를 잔잔하게 그려낸 한차현씨. 그는 “다른 작품에 비해 내 감정이 많이 들어갔다”고 말한다. 열림원 제공 |
“사랑이란 그런 것. 한때 숨 막히게 절실해도 그뿐인 것. 뻔뻔하도록 솔직하고 추하도록 자기중심적인 것. 화려한 미사여구의 장식 따위가 결국 부질없는 것.”(353쪽)
한차현씨는 보통의 연애 소설이 빠지기 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한참 벗어난 거대한 서사에 내맡기지도, 인위적인 복잡계로 빠지지도 않는다. 사랑은 그저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른다. 한차현씨는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다른 작품에 비해 내 감정이 많이 들어갔다”며 “주변에선 차현과 은원이 헤어지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고 했지만,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또 1990년 시대와 공간을 잘 살려낸 것도 소설을 풍성하게 해준다. 그는 이를 위해 남산도서관을 들락거리며 1990년대 신문철을 뒤지고 90년대 가요를 들었다고 한다. 당시에 모르고 지난 것도 뜻밖에 업데이트되기도 했다.
“정작 그 시절엔 미처 모르거나 무심코 스쳐갔던 것들을, 멀리서 회상하는 과정 속에서 새롭게 사귀는 일. 기억 속에 죽은 과거가 끊임 없이 변신하며 현재와 색다른 관계를 만들어가는 경우란, 대체로 이런 식이겠지요?”(‘작가의 말’ 중에서)
특히 소설가 박범신씨가 문학 후배를 따뜻하게 맞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덤이다. 소설 묘사처럼, 박범신씨는 실제 한차현씨 등이 평창동 자택을 찾아오자 반갑게 맞아주면서 술값을 쥐어줬다고 한다.
김용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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