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 서울 상암동 E&M센터에서 진행된 tvN '러브스위치' 촬영 현장. 녹화 시작 10분 전 MC를 맡은 개그맨 이경규와 신동엽은 녹화 직전 무대 위에서 ‘큐’ 사인을 기다리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 있고 서른 명이나 되는 여성 출연진들은 날개 모양처럼 좌우로 곧게 뻗어 있는 데스크에 자신의 이름이 붙여진 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고 옷매무새를 단장한다. 방송용 메이크업과 파티에 어울릴 법한 복장에 눈이 부시다.
결혼 적령기의 여성들 30여 명이 출연해 남자를 선택하는 방식의 프로그램인 '러브 스위치'는 tvN이 지난해 ‘대박’을 친 ‘롤러코스터’ 이후 가장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개그계의 두 ‘본좌’ 이경규와 신동엽이 처음으로 공동MC를 맡아 진행되는 공개 미팅형 데이트쇼로, 프랑스에서 최초로 시작해 세계 10여국에서 포맷을 빌려 방송하고 있다. 원제는 '테이크 미 아웃'(Take Me Out). 이를 모르는 시청자들은 간혹 ‘일본 프로그램과 똑같다’며 표절 의혹을 제기하는 황당한 경우도 가끔 있다.
화려한 무대 뒤. 수십 명의 제작진들은 분주하게 세트장 그늘 속을 움직인다. 무려 11대의 방송 카메라가 스튜디오 곳곳에 배치돼 있고,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는 편안한 캐주얼 차림의 스태프들이 스튜디오를 일사분란하게 오가고 있다.
녹화가 시작되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200여명의 방청객들은 온에어(ON AIR)에 불이 켜지는 순간 미리 약속했던 대로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친다. 신동엽과 이경규의 입담에 스튜디오는 금세 웃음의 도가니에 빠진다. 그리고 쇼는 시작된다.
◇ 남자가 나오는 자판기를 아시나요?
비슷한 인원이 남녀가 출연하여 서로를 점찍는 기존의 미팅 프로그램과 달리 ‘러브스위치’는 30명의 여성과 단 한명의 남성이 등장한다. 여성들은 남자의 외모와 직업, 자산 정도를 보며 스위치를 켜거나 끈다. 선택한다고 해서 그 남자가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성을 선택한 여성이 많을 경우 옆의 출연진들과 경쟁을 해 그 남자를 마지막까지 사수해야하는 과정도 겪어야 한다.
마치 거대한 자판기에서 다양한 남자가 끊임없이 나오는 모습이다. 한 남자가 2층에서 투명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무대로 내려온다. 30여 명의 여성들은 우선 외모를 보고 평가한 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붉은색 스위치를 켠다. 그리고 이어 남자가 직접 자기소개를 한 동영상을 함께 관람한다. 동영상에는 남자의 나이와 직업, 사는 집 등이 공개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다시 붉은색 스위치를 켠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초반에 탈락된다. 이날 녹화에 처음 출연한 큰 키에 비교적 준수한 외모를 갖춘 한 남성은 직업이 '단역 배우'라는 점에서 무수히 많은 붉은 스위치를 켜냈다. 결정적으로 서울 강남 가로수 길에서 산다는 남자가 안내한 자신의 집은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0만 원짜리 집이었다. 이 대목에서 100% 탈락이 확정됐다.
재미있는 것은 두세 명의 여성들은 “제가 하는 일과 비슷해서”라는 비슷한 이유를 댔다. 자신이 하는 동종 업계라서 싫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 아주 많은 여성들은 사실 자신들과 비슷한 일을 하는 남성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프로그램을 본 남자 시청자들은 ‘능력 있는 남자만 선택받는 더러운 세상’을 외칠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분명 이 시대의 자화상이다.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이길수PD는 “우리 감성에 맞는 포인트를 찾아 연애 심리와 미묘한 감정 드러내기를 통해 조금 더 리얼하게 이 시대 여성들의 애정관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지만 언뜻 보면 마치 ‘노예팅’을 연상케 한다. 한 남자를 가운데 세워놓고 “손가락이 예쁜 남자를 좋아하는데 저 분은 아닌 것 같아서”라거나 “직업이 조금 걸린다”라는 등의 솔직한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여자들은 매우 당당하고 무엇보다 즐거워 보인다. 그리고 소신 있게 자신의 이상형에 대한 조건을 읊는다. "저는 남자 엉덩이를 먼저 봐요. '쫄깃한' 엉덩이가 좋아요", "첫 만남에 키스요? 그날 필(feel)에 따라 다르죠." MC인 신동엽과 이경규는 이들의 말을 노련하게 맞받아친다. 카메라가 여성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을 때, 남성 출연자는 얼굴이 순간순간 달아오르는 듯 잠시 한숨을 고른다. 각오하고 출연했겠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신동엽은 기자와의 만난 자리에서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피하고 TV에 얼굴 나가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했는데 요즘에는 세상이 달라졌다”며 “다들 개인기도 가지고 있고 걸 그룹들의 춤도 출줄 안다. 예전과 너무 달라졌기 때문에 연예인보다 훨씬 과감하고 당당하고 솔직해 방송 진행함에 있어 불편함과 어려움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 특명! 제2의 '루저 발언'을 막아라
문득 이 예쁘장한 서른 명의 여성들은 어디서 왔을까 궁금해졌다. 한 출연자는 “아는 선배의 친구가 이 프로그램의 작가분과 친분이 있어 소개로 왔다”고 했고 다른 출연자는 “연예인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재미있을 것 같아 출연하게 됐다”고 귀뜸했다.하지만 제작진은 “연예 기획사에서 소개를 받는 것을 지양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획사에 전화 몇 통이면 편하게 섭외할 수도 있지만 최대한 주위 인맥을 이용하여 평범한 일반인들을 찾아내는 것을 선호한다. 우리나라 평범한 여성들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프로그램 의도에 부합하기 위해서다.
제작진은 “외모가 뛰어나더라도 다른 프로그램을 통해 최대한 노출이 안 된 사람이 우선이고 무엇보다 ‘진짜 싱글’인지 확인하는 절차도 거친다”고 전했다. 구두로 확인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가족관계 문서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이어 “TV 방송인만큼 외모가 중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일반인들도 성형수술을 많이 하는 요즘, 서로 비슷비슷해 보일 수 있는 우려를 고려한다”며 “무조건 깎아낸 듯이 예쁜 얼굴보다 개성 있는 외모를 선호 한다”고 말했다.
촬영 현장에서는 여느 TV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스케치북이 등장한다. 작가들이 MC에게 전달할 멘트를 크게 적기 위함이다. 내용이 적힌 스케치북은 스튜디오를 향해 높이 들어 올려지고, MC들은 그 내용을 재빠르게 읽고 진행의 방향을 정한다. MC들에게는 일종의 나침반 같은 개념이다. tvN '러브스위치' 촬영 현장은 무엇보다 '스케치북 사인'이 분주했다. MC들이 질문할 내용이나 분위기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상황에 맞게끔 그때그때 적어 알린다.
제작진은 이들 30여 명이 이 시대 모든 여성들을 대변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전반적인 시선이나 생각의 표현을 그대로 보여주되 수위 맞추기에 애쓴다. 6명의 작가가 섭외를 담당한다면 5명의 연출가는 출연진들의 한마디, 한마디를 꼼꼼히 체크해 편집에 반영한다.
‘수위 조절’은 제작진의 요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PD는 “어떠한 개인의 이상향을 일반화 시키지 않아야 한다”며 “적당한 선을 타기는 쉽지 않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낼 만큼의 소지가 있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 이제 막 시작한 프로라 아직은 위험성 발언은 없었지만 앞으로 좀 더 편해지고 익숙해지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아직은 방송이 ‘너무 착하다’고 걱정할 정도다.
지난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발언을 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한 여대생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루저'가 될 뻔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의 위력을 실감했다. 조금만 달리 표현했더라면 그저 텔레비전에 출연한 예쁜 여대생 정도로 지나갔을지 모른다. ‘솔직함’의 수위가 관건인 ‘러브스위치’에 ‘제2의 루저녀’가 나오지는 않을지 조마조마한 심정은 어쩔 수 없다.
/ 두정아 기자 violin8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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