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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갸거겨’ 노래서 AI 편지까지… 한세기 이어온 한글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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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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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100주년 전시 다채

‘일구이륙 무한이륙’ 기획전
배움·놀이·점괘… 생활 속 문자 조명
일제 맞서 지킨 ‘큰사전’ 원고도 선봬

‘훈맹정음’展·‘세종과 남준’展 눈길
한글 점자도 100돌… 역사 되짚어
‘소통’ 키워드로 세종·백남준 연결

“우리의 문화에 새봄이 돌아올 때면 우리의 정음 문자는 언제라도 세계 인류의 환호를 받을 것이다.” 1926년 잡지 ‘신민’에 실린 이 문장은 100년이 흐른 지금 현실이 됐다. 한글을 모어로 쓰지 않는 사람들이 한글을 배우고, 글자의 형태 자체가 디자인과 예술의 소재가 되는 시대가 됐다. 올해는 1926년 첫 ‘가갸날’ 기념식이 열린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아 지난 한 세기의 역사를 돌아보고 한글의 현재와 미래를 살피는 전시와 행사가 잇따르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가갸날’에서 한글날까지…100년의 이름과 기억

“가갸거겨….” 한글을 익히기 위해 외우던 이 음절 배열은 노래와 놀이가 됐고, 운수를 점치는 도구와 서예의 글감으로도 쓰였다. 100년 전에는 우리가 지금 ‘한글날’이라고 부르는 날의 이름이기도 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글학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함께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기획특별전 ‘일구이륙 무한이륙’을 열고 첫 가갸날부터 오늘의 한글날까지 100년의 역사를 펼쳐 보인다. ‘일구이륙’은 첫 가갸날이 열린 1926년을, ‘무한이륙’은 앞으로도 한글이 끝없이 뻗어나가기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

1926년은 훈민정음 반포 480돌, 여덟 번째 회갑을 맞은 해였다.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는 그해 11월4일 첫 기념식을 열고 당시 한글을 익힐 때 앞세우던 ‘가갸’에서 이름을 따 ‘가갸날’이라 했다. 하지만 전시는 그보다 앞선 1910년대부터 이미 훈민정음 창제를 기념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첫 가갸날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행사가 아니라 우리 글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쌓여 맺은 결실이었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 기획특별전 ‘일구이륙 무한이륙’ 전시에서 관람객이 옛 한글 학습 방식을 읽히는 ‘가갸거겨 나르샤’를 체험하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한글날 제정 100주년 기획특별전 ‘일구이륙 무한이륙’ 전시에서 관람객이 옛 한글 학습 방식을 읽히는 ‘가갸거겨 나르샤’를 체험하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한글날 날짜도 처음부터 10월9일은 아니었다. ‘세종실록’에 훈민정음이 세종 28년 음력 9월에 이루어졌다고만 적혀 있어 처음에는 음력 9월29일을 기념일로 삼았다. 지금의 날짜가 자리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말미 정인지 서문의 ‘9월 상한(上澣)’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음력 9월10일을 반포일로 보고 양력으로 환산하면서 오늘의 10월9일이 정해졌다. 광복 뒤에도 한글날의 자리는 굴곡을 겪었다. 공휴일이 됐다가 빠지고, 국경일로 지정된 뒤 다시 쉬는 날로 돌아왔다. 그렇게 오랜 논의를 거쳐 오늘날의 국경일이자 공휴일로 자리 잡았다.

날짜의 변천보다 눈길을 붙드는 것은 ‘가갸’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가갸거겨, 나냐너녀…”처럼 음절을 차례로 늘어놓은 표에서는 한글을 배우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한글 배열을 활용해 운수를 점치는 책.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 공주의 손녀 윤백영이 썼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한글 배열을 활용해 운수를 점치는 책.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 공주의 손녀 윤백영이 썼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새나 나무 등의 그림을 곁들여 글자를 쉽게 익히도록 만든 것도 있다. 배움의 도구였던 음절 배열은 놀이와 문화로도 번졌다. ‘가갸거겨’ 순서에 따라 말을 이어 부르는 ‘가갸뒤풀이’가 만들어졌고, ‘가’부터 ‘워’까지 글자를 둥글게 배열한 글자판으로 직업이나 이사, 시험 등의 운수를 점치기도 했다. 서예와 시의 글감으로도 쓰였다. 1908년 ‘대한민보’에 “가갸의 뒷다리도 모르는 양반”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만큼 ‘가갸’는 한때 글 자체를 뜻하는 생활어였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1910년대부터 퍼지기 시작했고, 1928년 ‘가갸날’도 ‘한글날’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우리 문자를 어떻게 쓰고 가르칠지를 고민했던 흔적은 실물 자료에도 남아 있다. 이번 전시에서 진품으로 처음 공개된 외솔 최현배의 조선어강습원 수업증서와 ‘한글’을 자음과 모음 낱자로 풀어쓴 또 다른 증서는 당시 국어학자들의 다양한 시도를 보여준다.

국어학자 최현배(1894∼1970)가 받은 한글배곧(조선어강습원) 고등과 졸업증서.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국어학자 최현배(1894∼1970)가 받은 한글배곧(조선어강습원) 고등과 졸업증서.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전시의 분위기는 조선어학회와 사전 원고 앞에서 한층 묵직해진다. 일제강점기 한글날을 기념하고 우리말을 가르치는 일은 단순한 학문 활동에 머물지 않았다. 조선어학회는 강연과 강습, 사전 편찬을 이어갔고, 일제에 압수됐던 ‘조선말 큰사전’ 원고는 광복 직후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돼 이후 사전 편찬의 밑바탕이 됐다. 한글날의 100년은 날짜와 이름의 역사인 동시에 우리말과 글을 지켜온 사람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전시 후반부는 과거에서 미래로 시선을 돌린다. 시대별 한글날 사진과 영상을 살펴본 뒤 미래의 누군가에게 한글로 편지를 쓰면 인공지능(AI)이 답장을 만들어준다. 100여년 전의 음절표와 수업증서에서 AI까지, 한글이 사람들의 삶 속에서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쓰이고 이어져 온 시간이 한 공간에 겹쳐진다.

‘가갸거겨’로 시작되는 음절표가 처음으로 등장한 1527년 간행 교재 ‘훈몽자회’.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가갸거겨’로 시작되는 음절표가 처음으로 등장한 1527년 간행 교재 ‘훈몽자회’.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이번 전시는 한글의 우수성을 다시 설명하기보다 우리가 왜 지난 100년 동안 한글을 위한 날을 따로 만들고 기념해 왔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전시는 내년 2월9일까지.

◆훈맹정음부터 백남준까지…한글의 또 다른 얼굴

한글의 또 다른 역사와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시도 이어진다. 국립한글박물관과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7일 특별전 ‘점에서 세상으로: 훈맹정음 100년’을 연다. 송암 박두성(1888∼1963)이 조선어점자연구회를 결성해 연구한 끝에 1926년 완성한 한글 점자 체계 ‘훈맹정음’의 한 세기를 돌아보는 자리다. 첫 가갸날과 같은 해 탄생한 훈맹정음은 여섯 개의 점을 조합해 한글을 손끝으로 읽고 쓸 수 있게 했다. 전시는 훈맹정음이 만들어진 과정과 이후 시각장애인의 교육과 지식 접근을 넓혀온 역사를 관련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한글날인 9일에는 세종시 중앙공원 비엔날레전시관에서 개관 기념 특별기획전 ‘세종과 남준’이 막을 올린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을 ‘소통’과 ‘창조’라는 공통점으로 연결한 전시다. ‘소통, 한글과 비디오 아트’, ‘협업, 집현전과 플럭서스’, ‘경계를 넘어 확장하는 예술’ 등 3부로 구성해 두 인물이 시대와 분야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소통방식을 만들어간 과정을 살핀다. 내년 제1회 세종한글비엔날레 예술감독을 맡은 박미화 감독이 총괄했으며 전시는 다음 달 8일까지 열린다. 6∼8일 광화문 일대에서 열리는 ‘한글한마당’에서는 한글을 소재로 한 문화상품과 콘텐츠를 선보이는 산업전 등도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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