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1년 4월,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항구의 포트 섬터 요새에서 포성이 울렸다. 연방에서 이탈한 남부연합군(남군)이 미 연방군(북군) 요새를 포격하면서 시작된 남북전쟁은 그 뒤로 4년 동안 이어지며 150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남북전쟁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 타협이 실패하며 쌓인 분열이 폭발해 폭력으로 이어진 결과였다.
그 중심에는 노예제도가 있었다. 북부는 자유노동을 기반으로 한 산업 경제를, 남부는 노예노동에 기반을 둔 대농장 경제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북부의 눈에 노예제는 비도덕적 제도였지만 남부에 그것은 생존과 번영의 필수조건이었다. 새로운 서부 영토가 개척될 때마다 그곳에 노예제를 허용할 것인가가 정치의 핵심 쟁점이 되었고 연방의 균형은 점점 흔들렸다.

1820년 ‘미주리 타협’과 ‘1850년 타협’ 같은 정치적 타협은 모두 미봉책에 불과했다. 특히 북부 시민에게 도망 노예사냥에 협조하도록 강요한 도망노예법은 북부 사회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북부에서 노예제는 단순한 정치적 논쟁을 넘어 도덕적 절대악으로 인식되었다. 이어 각 지역이 노예제 허용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한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은 ‘피의 캔자스(Bleeding Kansas)’라 불리는 실제 무장 충돌로 이어졌다. 이미 내전의 전조가 시작된 것이었다.
이 시기 미국 정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타협의 붕괴였다. 휘그당은 분열로 사라졌고, 노예제 확산 반대를 내세운 공화당이 급부상했다. 남부 정치인들은 연방의 권한을 자유를 억압하는 폭정이라 비난했다. 이제 정치의 언어는 도덕적 선악으로 바뀌었고 타협은 배신이 되었다. 결국 1860년 링컨의 당선은 남부 주들에게 우리는 더 이상 이 연방의 일부가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7개 주가 탈퇴했고, 이를 인정할 수 없었던 연방정부와 북부 주들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정치적 타협이 실패로 끝날 때 시작된다. 상대를 설득과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존재로 보기 시작하면 정치의 기능은 마비되고 사회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럴수록 폭력은 정당화된다. 여기에 전쟁을 쉽고 빠른 수단으로 여기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북부와 남부 모두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라고 믿었지만 전쟁은 언제나 인간의 예상을 벗어났다. 1차 대전의 유럽도, 6·25전쟁의 북한도, 러·우 전쟁의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남북전쟁의 교훈은 더 이상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타협이 사라지고, 내 편만이 옳다는 신념이 도덕적 확신으로 굳어지며, 정치가 실패해 전쟁이 쉬운 해법처럼 여겨질 때 역사는 늘 같은 비극을 반복한다. 오늘날의 미국과 세계정세를 보면 그렇게 될까 우려스럽다. 링컨이 남긴 “서로 갈라진 집은 바로 설 수 없다”는 경고가 지금도 유효하길 바란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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