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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산대사 휴정 [‘민족불교의 3대 정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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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0-19 14:32:23 수정 : 2025-10-19 14:32:21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hulk1983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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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생사일여의 전장에서도 빛난다”

 

‘민족불교의 3대 정신사(精神史)’는 불교가 민족의 고난과 현실에 어떻게 응답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계보이다. 서산대사 휴정은 전란 속에서 수행을 전장으로 옮겨 호국의 불교를 세웠고, 용성스님은 산을 내려와 한글 경전과 사회개혁으로 민중 속에 불법을 심었으며, 만해 한용운은 시와 사상으로 식민의 억압 속에서 정신 해방의 불교를 완성했다. 하나같이 걸출한 세 선승(禪僧)의 삶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수행과 실천을 올곧게 이어갔던 한 줄기 국가수호의 맥이 시대를 넘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주>

 

“대사께서 연로하신데, 어찌 전쟁터로 나가시렵니까?” 묘향산 제자 처영이 간곡히 만류했을 때, 노승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렇게 말했다. “중생이 고통받는데 어찌 선방에만 머물겠느냐. 이 몸이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서 있어야 한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화마가 온 조선을 삼키던 봄, 서산대사(1520~1604)는 73세였다. 그럼에도 한 손에는 염주를, 한 손에는 격문을 쥐고 전국 사찰에 글을 보냈다. “나라가 위태로우니 승군을 일으켜 구하라.” 조선조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사회적 역할이 제한됐던 불교는 그의 붓끝에서 다시 살아나 민중의 가슴속으로 스며들며 나라를 지키는 힘이 되었다.

 

해남 대흥사 내 표충사에 봉안되어 있는 서산대사 진영(眞影).

儒學 학동 내면에 스민 회의

 

서산대사의 본명은 최여신(崔(汝信). 법명은 휴정(休靜)이고, 묘향산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불렸다. 그는 1520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어릴 적 부모를 잃었다. 고을의 군수 이사증(李師曾)의 집에서 자랐는데, 이사증은 어린 최여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덕분에 최여신은 평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책 속의 도덕과 학문은 그의 마음 속 깊은 공허를 채워주지 못했다. 그는 세상의 부조리와 인간의 고통을 바라보며 점점 내면의 세계로 마음이 기울어갔다.

 

“공자께선 인(仁)을 말하지만, 왜 그 인이 현실을 구하지 못하는가?” 그가 성균관 유생들과의 토론 중 던진 말이다. 이 한마디는 이미 그의 마음이 유학의 울타리를 넘어서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스무 살이 갓 지난 어느 날, 최여신은 과거급제에 실패해 시무룩해 있는데 숭인(崇仁)이라는 노승이 찾아왔다. 산에서 부는 바람이 옷자락을 여신의 스치고 있을 때, 노승이 물었다. “그대는 글공부로 무엇을 얻었는가?” 여신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세상을 바르게 하고자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노승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그대 마음부터 바로잡아야 할 때다.” 그 한마디가 최여신의 마음 깊은 곳을 울렸다. 세상의 옳고 그름을 좇던 젊은 유학도는 그날 숭인에게 머리를 깎고 불가에 귀의하게 된다.

 

출가 후 휴정은 묘향산, 금강산, 오대산 등지를 오가며 수행에 전념했다. 한겨울 얼음 위에서 좌선도 하고, 봄이면 들꽃 사이에 앉아 ‘마음의 근원’을 관조했다. 그는 선(禪)과 교(敎)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선교겸수(禪敎兼修)’를 주장하며 조선 불교의 새 방향을 열었다.

 

그는 수행 지침서 ‘선가귀감(禪家龜鑑)’, 시문집 ‘청허당집(淸虛堂集)’ 등을 남겼는데, 특히 ‘선가귀감’은 시주를 받아 살면서 수행을 게을리하는 승려들을 무섭게 다그치고 있다. “수행자는 음식을 먹을 때 독약을 먹는 것 같이하고, 시주를 받을 때는 화살을 받는 것처럼 하라. 뜨거운 철판을 몸에 두를지언정 신심 있는 이가 주는 옷을 입지 말고…” 휴정은 이것을 삶 속에서 일관되게 실천해 보였다.

 

영규 대사가 이끄는 의승군들의 용맹이 담긴 그림 ‘청주성탈환도’. 충남 금산 ‘칠백의총 기념관’ 소장.

칼을 든 스님 의승군 총지휘

 

휴정은 1552년 33세 늦깎이 나이에 승과에 합격해 고위관리직인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로 임명되었다. 한동안 승과가 실시되지 않던 상황이어서 휴정의 승과 급제는 조선시대 불교정책에 눈에 띄는 사건이었다. 휴정은 대선(大選), 주지(住持), 전법(傳法), 교종판사, 선종판사 등의 직위를 지내던 중 ‘내가 출가한 본래 뜻이 이런 것들었나’라고 크게 탄식했다. 그는 곧 공직에서 물러나 묘향산으로 숨어들었으며, 이후 학문과 수행을 지도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 마음을 쏟았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가 한양을 함락하고 선조(宣祖)가 평양을 거쳐 평안도 의주까지 피난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선조는 묘향산에 사신을 보내에 휴정을 부르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구할 방도를 물었다. 휴정은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것을 약속하고, 선조(宣祖)로부터 최고 승려 관직인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의 벼슬을 부여받는다.

 

그의 제자 가운데 사명대사(속명 朴惟政)가 있었다. 하루는 사명이 물었다. “스승님, 부처님은 자비를 말 하시는 데, 칼을 잡는 일이 자비입니까?” 휴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칼의 끝에도 자비가 깃들 수 있다. 중생을 구하는 일이라면 칼날 또한 불심의 길이 된다.” 이 대화는 훗날 사명대사가 외교사로 나서 왜장과 담판을 벌일 때까지 이어진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서산대사가 임진왜란 때 평남 순안 법흥사에서 전국적으로 모집해 몰려온 의승군(義僧軍) 수는 5천 명에 달했다. 그는 영규(盈奎), 처영(處英), 사명 등 수행 제자들을 각지에 파견했다. 영규 대사는 승병 1천 여명과 방어사 이옥의 군대 500명으로 청주성을 탈환했으며, 평양성 전투 참여 등 승군의 활약상은 조정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전쟁의 끝 무렵 심신의 노쇄함을 느낀 휴정은 사명대사 유정에게 승군 전체의 통수권을 맡기고 묘향산 은거처로 돌아갔다.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휴정의 공로를 높이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을 내리고, 시 한 수를 지어 공을 칭송했다. ‘산은 말없이 나라를 지켰다.’ 서산대사와 의승군의 묵묵한 헌신과 용맹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전후 법흥사에서다. 제자들이 서산대사에게 세속의 명예를 권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명예는 바람과 같고, 도는 산과 같다.” 1604년 여름, 그는 묘향산 원적암에서 조용히 적멸에 들었다. 향년 85세, 법랍은 67세였다.

 

인생의 황혼기임에도 서산대사는 법흥사에서 제자들을 이끌며 수행의 길과 나라를 지키는 길을 하나로 결집했을 터, 산사의 고요를 깨우는 그곳에서 수행과 무예는 마치 한 몸처럼 어우러졌다. 오늘날 서산대사의 입적지 법흥사 대신에 해남 대흥사가 서산대사와 의승군의 추모·기념 공간으로 기억되는 것은 한반도 분단의 원인이 클 것이다.

 

남도 불교의 거점 대흥사(大興寺) 내 사당 표충사(表忠祠)에는 서산, 사명, 처영 삼대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돼 세월에도 바라지 않은 나라사랑의 정신을 품고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사찰의 깃발, 고요히 자리를 지키는 진영 앞에 서면, 그들의 헌신과 나라를 위한 희생이 아직도 숨결처럼 잔잔히 살아 있다. 서산대사가 남긴 ‘선가귀감’은 4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전국 선방에서 낭독되며 수행자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참된 수행은 세상사 외면 안 해

 

산중의 고승이면서 동시에 생사일여의 전장 한가운데 섰던 승군 지도자 휴정. 그의 삶은 ‘깨달음은 고요 속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붓다의 설법은 인간의 고통과 함께 호흡할 때 비로소 진정한 빛을 발함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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