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현대무용의 패러다임을 바꾼 무용가 피나 바우쉬(1940-2009). 전통 발레의 엄격한 규범에서 벗어난 연극적 요소와 일상적 몸짓을 무용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로써 만들어진 장르가 ‘탄츠테아터(Tanztheater·무용극)’. 그저 춤의 기교를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인간 존재의 욕망과 불안, 사랑과 폭력, 사회적 규율과 억압을 무대 위에서 날카로우면서도 시같은 몸짓으로 드러냈다.
‘카네이션’은 1982년 독일 탄츠테아터 부퍼탈에서 첫 선보이며 바우쉬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준 중기 대표작. 초연 당시 분홍빛 카네이션 수천송이로 채워진 무대에서 무용수들은 카네이션을 밟으며 행진하거나 쓰러지고, 군인 복장을 한 인물이 등장해 권위와 통제를 상징하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아름다움과 폭력이 공존하는 인간 사회의 아이러니가 꽃밭에서 펼쳐지며 객석을 압도한다.
우리나라에선 2000년 LG아트센터 개관작으로 초연된 이 작품이 25년만에 다시 한국 관객을 만난다. LG아트센터와 탄츠테아터 부퍼탈을 이끌었던 바위쉬가 쌓아온 25년의 특별한 역사를 기념하는 무대다. 2000년 LG아트센터측과 개관작을 논의하던 당시 바우쉬는새롭게 문을 연 공연장에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며 ‘카네이션’을 추천했다고 한다. 이후 바우쉬는 LG아트센터 무대에서 ‘봄의 제전’, ‘카페 뮐러’ 등 상징적인 작품을 포함해 모두 8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2005년에는 LG아트센터 5주년을 기념해 한국을 소재로 한 ‘러프 컷(Rough Cut)’을 제작했을 정도로 바우쉬는 서울과 LG아트센터를 특별하게 여겼다.
‘카네이션’ 창작의 영감은 1980년 남아메리카 투어 중 피나 바우쉬가 칠레 안데스 산맥에서 마주한 양치기 개가 뛰노는 카네이션 들판에서 비롯되었다. 이 인상적인 풍경은 무대디자이너 페터 팝스트에 의해 초현실적인 무대로 구현됐다. 피나 LG바우쉬는 2000년 당시 내한을 앞둔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젊음과 아름다움이 상징하는 ‘희망’과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무대를 가득 메운 카네이션 사이로 군화를 신은 남성이 행진하고, 무용수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관객에게 말을 건다. 유머와 풍자가 공존하는 장면 속에서 억압과 통제의 현실이 드러나고, 공연이 끝날 무렵 꽃밭은 짓밟혀 흩어지며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카네이션 9000송이로 채워질 이번 무대에는 1980년대부터 활동해온 기존 무용수들과 2019년 이후 합류한 젊은 세대가 함께 무대에 함께 오른다. 특히 바우쉬 생전에 함께 작업했던 안드레이 베진(Andrey Berezin), 아이다 바이네리(Aida Vaineieri), 에디 마르티네즈(Eddie Martinez), 김나영, 그리고 실비아 파리아스(Silvia Farias)가 참여한다.
이 가운데 실비아를 제외한 네 명은 25년 전 ‘카네이션’의 한국 초연 무대에도 올랐던 주역들이다. 이번 투어에서 베진과 바이네리는 무용수로, 마르티네즈와 파리아스는 리허설 디렉터로서 과거의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피나 바우쉬의 유산을 오늘의 감각으로 재창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또한 무용단에서 오랫동안 무용수로 참여했던 김나영은 이번 내한에 리허설 어시스턴트로 참여할 예정이다. LG아트센터 서울에서 11월 6일부터 9일. 세종예술의전당에서 11월 14일부터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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