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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자’의 恨 품어 안은 英 왕실의 품격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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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9-08 06:01:36 수정 : 2025-09-08 07:44:00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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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또는 테니스에 문외한이더라도 1980∼1990년대 세계 여자 테니스계의 슈퍼스타로 군림한 독일 출신 슈테피 그라프(56)의 이름은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1987년을 시작으로 프랑스·호주·US 오픈과 윔블던(영국)까지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 여자 단식에서 총 22개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는 메이저 대회 여자 단식 통산 24회 우승에 빛나는 마거릿 코트(호주), 23회 우승의 세리나 윌리엄스(미국)에 이은 역대 3위 기록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금메달 또한 그라프가 차지했으니 한국인들의 뇌리에 유독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고 하겠다.

 

1993년 영국 윔블던 테니스 대회 여자 단식 결승전에서 독일 선수 슈테피 그라프에게 분패해 준우승에 그친 체코 선수 야나 노보트나(왼쪽)가 시상식장에서 오열하자 영국 왕실 구성원인 켄트 공작(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사촌 동생) 부인 캐서린이 트로피를 건네기 전 노보트나를 꼭 끌어 안은 채 다독이고 있다. 당시 캐서린은 노보트나에게 “언젠가는 윔블던에서 우승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영국 PA 통신

1997년 30세를 끝으로 은퇴한 그라프와 거의 동시대를 산 선수로 야나 노보트나(1968∼2017)가 있다. 체코 출신의 노보트나는 늦깎이로 프로에 입문한 대기만성의 전형이었다. 메이저 대회로는 1993년과 1997년 윔블던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 30대에 접어들기 전 거둔 최고의 성적이었다. 특히 그라프와 맞붙은 1993년 윔블던 결승전은 세계 여자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힌다. 만년 ‘2인자’ 노보트나가 경기 후반까지 월등히 앞서가며 생애 첫 메이저 우승컵을 품에 안을 것이란 관측이 제기됐다. 하지만 그라프는 역시 강했다. 지나치게 우승을 의식한 노보트나가 압박을 못 견디고 실수를 연발하는 사이 그라프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득점한 끝에 역전 우승을 일궈냈다.

 

1998년 영국 윔블던 테니스 대회 여자 단식에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한 ‘30세 노장’ 야나 노보트나(체코)가 우승컵을 든 채 기뻐하고 있다. 노보트나는 암 투병 끝에 2017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했다. SNS 캡처

시상식에서 노보트나는 말 그대로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하는 노보트나가 안쓰러웠던지 시상자로 나선 켄트 공작 부인 캐서린이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윔블던에서 우승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사촌 동생인 켄트 공작 에드워드의 부인으로 영국 왕실 구성원인 캐서린의 이 같은 행동은 윔블던 협회의 의전 규범에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다. 공작 부인의 기(氣)를 받았기 때문일까. 노보트나는 결국 30대 노장이 된 1998년 윔블던에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메이저 대회 단식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2017년 암으로 별세하기 전 언론 인터뷰에서 노보트나는 “(캐서린이 베푼 호의는) 여자 테니스 역사에 길이 남을 인간적 장면”이라며 “내가 우승한 것처럼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1933년생으로 엘리자베스 2세 서거 후 영국 왕실의 최고령 어르신이었던 캐서린이 지난 4일 9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전 세계 테니스 선수와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고인을 기리며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생애 내내 선행으로 모두한테 인간적 감동을 선사했다”고 추모했다. 고인이 1994년 영국 국교인 성공회에서 이탈해 가톨릭으로 개종했음에도 찰스 3세 국왕과 카멀라 왕비는 오는 16일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열릴 장례 미사에 직접 참석할 예정이라고 한다. 노보트나와 캐서린이 하늘나라에서 재회하면 어떤 대화로 회포를 풀지 못내 궁금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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