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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의감성엽서] 아, 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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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9-02 23:11:35 수정 : 2025-09-02 23: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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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글을 써야 하나? 아니면 그만두어야 하나? 아침에 일어나면 늘 드는 생각. 그러나 그 생각은 끝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보다는 글쓰기를 게을리한 자기반성에 더 가까운 깊은 낭패감. 아마도 사뮈엘 베케트 역시 그 희곡을 썼을 때 나처럼 절망의 끄트머리에 서 있었을 거야.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오리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 그것은 마지막 희망이었을까? 아니면 덧없음의 절망에 대한 절망이었을까? 그 차이는 신과 자신만이 아는 일. 그 안에 한 그루 나무라도 심지 않으면 점점점 고도가 되어갈 것 같은 이 시대, 나는 조금 미친 사람이 되어 고도의 문을 활짝 연다.

그사이로 밤새 귀뚜라미들은 울고, 대추나무엔 대추들이 송골송골 맺히고, 내게 남은 아주 작은 사랑은 포도처럼 으깨져 와인이 되고, 그 위를 맴도는 검은 독수리 떼.

그들을 의식하면서도 나는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연다. 노트북 곁으로 하나둘씩 내려앉는 독수리 떼. 매섭고 날카로운 그들의 부리, 무엇이든 쪼아 먹을 것 같고, 무엇이든 놓치지 않고 찾아내는 그들의 부리부리한 눈동자. 그 모든 게 절망처럼 깊고 어둡다. 칠흑 같은 밤처럼 아름답다. 한번 빠지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고도. 그 속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 작고 작아서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은 내 사랑. 그 사랑을 보듬으며 자판을 두드린다. 손이 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그러다 책꽂이에서 로르카의 시집을 꺼내 그중 한 편의 시를 읽는다. ‘투우장에서의 죽음’. 나는 그 시를 읽을 때마다 제목을 ‘오후 다섯 시’로 바꾸어 읽는다.

로르카가 무척 좋아했던 투우사. 그는 오후 다섯 시에 투우장에서 죽었다. 1934년. 그는 그 투우사를 애도하며 이 시를 썼다. “오후 다섯 시에/ 정각 오후 다섯 시였다./ 아이 하나가 하얀 천을 가져왔다/ 오후 다섯 시에./ 미리 준비된 횟가루 칠한 하얀 가마니/ 오후 다섯 시에./ 그것뿐, 모든 것은 죽음, 오직 죽음뿐/ 오후 다섯 시에.”로 시작하는 이 긴 시를 나는 정말 좋아한다. 그 리듬과 힘과 울분, 그 시어들 사이사이에 배치된 죽음의 비통함과 공허, 그 사이로 경이로운 빛처럼 쓰러지는 투우사. 그 죽음은 크리스마스 저녁, 하얀 눈 위에 쓰러져 죽은 로베르트 발저와 겹쳐지면서 죽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그토록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 그 습득되지 않는 고도의 찬란한 순간을 보여준다.

그러니 두려워 말자.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너와 나에게 햇빛만, 근사한 햇빛만 비친다면 우리 안에 사는 고도 또한 상쾌하고 활기차게, 약동하는 생명의 리듬을 놓지 않을 거야. 고도란 생명이고, 사랑이고, 질문이고, 기다림이니까. 한 줄 글을 쓰기 위해 언제나 호주머니에 펜과 공책을 넣고 다니는 너와 나처럼!

김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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