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에 대하여/ 문형배/ 김영사/ 1만8800원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지난 4월4일 11시22분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차분한 표정으로 결정문의 마지막 문장을 낭독했다. 탄핵 선고 2주 뒤 그는 7년간의 헌법재판관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문 전 대행은 부산고법 판사로 재직하던 1998년부터 퇴임 후인 올해 8월까지 블로그와 사법부 게시판에 1500여편의 글을 올렸다. 신간 ‘호의에 대하여’는 산책길에서 발견한 나무 얘기부터 무경험을 극복하기 위해 읽은 책, 평생의 멘토였던 김장하 선생과의 추억, 자살을 시도했다가 마음을 되돌린 재소자, 건강한 법원과 사회를 향한 조언까지 120편을 선별해 담았다.
경남 하동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김장하 선생의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해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아라”라고 했던 김장하 선생의 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영향 때문인지 문 대행이 쓴 글에는 유난히 평범한 사람들에게 나오는 ‘호의’에 대한 예찬이 자주 등장한다. 손해배상 사건에서는 원고와 피고가 적당히 양보하는 조정절차를 중요시했다. 타협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건에서는 이해당사자들과 녹차 한 잔을 같이 한 덕분에 조정안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자살을 하려고 여관에 불을 지른 피고인에게 문 대행이 ‘자살’을 10번 외치게 한 뒤 “우리 귀에는 ‘살자’로 들린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한 일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일상 속 호의의 힘 덕분이다.
문 대행은 판사가 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복역 중인 기결수가 “판사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쓴 편지가 법원을 떠나지 못하게 붙잡았단다.
“판사가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을 죽일 수는 있다. 선고 전날 아파트단지 내 공원을 산책한다. 내일의 판결을 머리로 그려보고, 결론에 자신 있는지를 검증한다.”(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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