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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섭의전쟁이야기] 광복의 기쁨, 분단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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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8-17 22:44:32 수정 : 2025-08-17 22:4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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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한반도에 광복의 아침이 밝았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과 열망 위에 태평양전쟁 후반부의 치열한 전투와 격동하는 국제정세가 맞물려 빚어낸 역사적 결과였다.

태평양전쟁은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됐다. 전쟁 초반 일본군은 승승장구했지만, 1942년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에서 패배하며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 전투들로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은 미국은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1944년 6월 마리아나제도를 점령해 일본 본토를 B-29 폭격기의 사정권에 두었고, 같은 해 10월 레이테 해전에서 일본 해군 주력을 궤멸시켜 일본의 ‘절대방위선’을 무너뜨리며 전쟁의 승패를 사실상 결정지었다.

소련의 태평양전쟁 참전이 결정된 얄타회담의 모습. 왼쪽부터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소련의 스탈린.

그럼에도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작은 섬에서도 끝까지 항전하는 ‘옥쇄(玉碎)’를 고수해 미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특히 1945년 4~6월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일본군 약 13만명, 미군 6만7000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민간인 약 1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희생을 줄이고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 위해 소련의 참전을 기대했다. 실제로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이 독일 패전 3개월 뒤 참전하는 조건으로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 만주 이권을 내주었다. 그러나 원자폭탄이 완성되자 전략은 바뀌었다. 미국은 소련의 참전 이전에 폭탄을 투하해 전쟁을 끝내는 동시에 소련이 동북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나가사키에 폭탄이 떨어진 그날 밤, 소련군은 ‘8월의 폭풍’ 작전을 개시해 만주를 넘어 한반도의 함경도와 평안도 북부까지 진격했다.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이라는 이중 압박 속에서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고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우리의 광복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의 치열한 전개와 그로 인한 국제정세의 격변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군은 38도선 이남에, 소련군은 그 북쪽에 진주하며 한반도는 분할 점령 체제로 들어갔고, 불과 3년 뒤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처럼 광복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와 일본의 패망으로 찾아왔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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