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증권시장이 첫선을 보인 것은 지난 1956년 3월3일. 서울 명동이었다.
개장 첫해 주식거래 실적은 3억9400만원에 불과했다. 당시 중개인들이 호가를 내면 거래소 직원이 망치를 두드려 가격을 결정했다. 모든 게 수작업으로 이뤄졌다. 지금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거래방식이다.
그런 증시가 한국 경제의 성장과 함께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이제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시장으로 주목받고 있고, 신흥국에 시스템을 수출하는 단계로 도약했다.
증권시장의 '60년 성장의 발자취'를 사진으로 살펴본다.
1. 대한증권거래소·증권시장 개장
1956년 3월3일 대한증권거래소가 출범하면서 한국 증권시장의 역사가 시작됐다. 출범 당시 상장기업은 12개에 시가총액은 150억원 수준에 불과했다.
2.격탁매매 모습
초창기 한국증시의 거래 모습은 전자화가 완벽하게 구축된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증권 거래하기 위한 호가와 매매에는 수신호와 나무막대를 치는 ‘격탁’방식이 쓰였다. 이 방식은 증시 출범 이후 1975년 개별경쟁매매(포스트매매) 방식이 나올 때까지 쓰였다.
3.서울 명동 포스트매매 시장의 모습
한국거래소는 포스트매매를 1975년 1월4일 도입했다. 이 방식은 상장종목을 배정한 뒤 호가표로 호가를 하고 호가집계표를 이용해 시가를 정하는 방식으로 격탁매매보다 발전된 양식의 거래방식이다.
4.포스트매매 전산화
1988년 3월3일 한국거래소는 전산매매제도를 도입했다. 사람이 일일이 주식거래에 참여했던 과거에 비해 증권 매매의 전산화는 효율성과 신속성 측면에서 월등한 강점이 있었고 더 많은 투자자와 유동성을 증시로 불러 모았다.
5.코스피 1000포인트 돌파
1983년 1월4일 시가총액방식 종합주가지수제도가 도입되면서 100으로 시작한 코스피 지수는 경제성장이 고도화되던 80년대 후반에 들면서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1986년 4월 200선을 넘긴 코스피는 1987년 8월 500선을 뚫었고, 1988년 12월에는 900선 역시 넘어섰다. 그리고 1989년 3월31일 1000포인트를 상향 돌파하며 ‘코스피 1000시대’를 열었다.
6.1990년대 증권시장의 모습
1990년대는 한국 경제의 고도화와 발맞춰 질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1992년 외국인의 국내증시 직접투자가 허용되면서 외국인의 한국 증시 참여가 활발해졌고, 코스닥 시장과 옵션. 선물 시장이 연이어 개설되며 증시의 선진화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7.코스닥 시장 개장
1996년 7월1일 중견기업과 중소기업 등 성장성이 높은 기업들의 원활한 자금조달을 지원하기 위해 코스닥 시장이 개설됐다. 기술이나 잠재력을 갖춘 기업들에 자금 유동성이 공급돼 발전을 거듭하면서 한국 경제는 물론 증시는 일대 호황을 맞게 됐다.
8.ETF시장 개장
상장지수펀드(ETF)는 특정 지수나 종목 포트폴리오를 추종하는 펀드를 일반 종목처럼 사고 팔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시장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선진국형 투자수단이다. 한국거래소는 지난 2002년 10월14일 ETF시장을 개장해 한국증시의 선진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9.한국 증시 FTSE선진국지수 편입
2009년 9월14일 한국 증시는 FTSE선진국지수에 편입됐다. 이 지수는 영국의 경제지인 파이낸셜타임스와 런던증권거래소가 공동으로 발표하는 지수로, 한국 증시의 FTSE 편입은 한국 증시가 규모와 질적 수준이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외국투자가들이 한국 증시에 대해 신뢰할 수 있게 되면서 외국인 자금 수급에도 청신호가 켜지게 됐다.
10.명동 대한증권거래소와 한국거래소 서울사옥
1956년 출범한 대한증권거래소는 명동에 위치하면서 1979년 7월 여의도로 옮기기까지 20년 넘게 한국 증시의 태동기와 성장 초기를 함께했다. 이후 한국거래소의 서울 여의도 시대는 2005년 변화를 맞았다. 공공기관 지방이전사업의 일환으로 본사를 부산 국제금융로로 이전한 것이다. 현재 거래소는 증권사들이 즐비한 여의도와 아시아 금융허브로 발전할 부산에서 새로운 발전을 꾀하고 있다.
강중모 기자 vrdw88@segye.com
<세계파이낸스>세계파이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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