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교사 제보받은 6사단 기습작전 섬멸
전승지 제대로 보존안돼 잊혀질 위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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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벌어진 이후 국군이 거둔 최초의 승전으로 기록된 동락전투의 전승비. 지난달까지 도비 등 2억원이 투입돼 전승비 보수, 가로수 및 공원정비가 이뤄졌으나 아직 안내판도 없다. |
6·25전쟁 초창기에 우리 육군은 북한군의 탱크에 속수무책이었다. 박격포탄을 메고 탱크로 돌진하며 육탄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의정부와 서울의 저지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렇듯 개전 초기 파죽지세의 북한군에 한국군은 연패를 거듭했다.
역사에 기록된 유명한 전투들도 대부분 중공군의 5차에 이르는 대공세에 이어 휴전회담에 들어간 뒤 중동부전선에서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시작되면서 생겨났다.
이 때문에 서울을 점령하고 물밀듯이 남하하던 북한군에게 일격을 가했던 동락전투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서울이 점령되자 위수지역인 강원 춘천을 포기하고 충주·음성 지역까지 철수한 국군 제6사단 예하 7연대가 북한군을 맞은 것은 전쟁 발발 12일째인 1950년 7월7일.
당시 임부택 중령이 인솔하던 7연대는 북한군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1대대를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와 음성읍을 잇는 도로에, 2대대를 충주시 신니면 동락리 부용산 644고지에 배치해 일전을 벼르고 있었다.
2대대를 인솔하던 김종수 소령은 동락초교 교사인 김재옥(당시 19세·여)씨로부터 “2시간 전에 북한군 3000여명이 동락리로 들어와 학교와 주변 마을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정탐 결과 주민들로부터 “국군이 철수했다”는 허위 정보를 들은 북한군 제15사단 예하 48연대가 학교 주변 일대에 집결한 것이었다. 교정에 10여대의 포를 설치하고 장갑차와 각종 차량을 줄지어 세워놓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사안이 급박하다고 판단한 김 소령은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기로 하고 오후 5시 공격명령을 내렸다. M1 소총이 불을 뿜으며 전투는 시작됐고, 신용관 중위가 이끄는 박격포부대는 적진을 향해 포탄을 퍼부었다. 이튿날 오전 10시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국군은 북한군 2186명 사살과 132명 생포, 트럭 60대를 비롯한 군수품 1200여점 노획이라는 엄청난 전과를 거뒀다.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신용관(83·서울 거주)씨는 23일 “그때는 정말 대단했지. 북한군이 손 한번 쓰지 못하고 고꾸라졌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이내 “지금은 승리의 흔적이 너무 초라해 안타깝기만 할 뿐이지”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동락전투는 6·25 발발 이후 거둔 국군의 첫 승리였고, 모든 대대원이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기까지 했다. 유엔에 보내진 노획 군수품이 소련제로 확인되면서 유엔군이 한국전에 참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다른 전승지에 비해 초라하게 보존되다보니 동락전투의 전과를 기억하는 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신씨는 “당시 ‘국군이 남쪽으로 도주해 한 명도 없다’고 북한군에게 허위 제보를 해 전투가 끝나고 나서 퇴각하는 북한군에게 학살당한 주민들의 넋을 기리고 유족들을 위로할 수 있도록 동락 전승지를 꼭 성역화해 달라”고 당부했다.
박병진 기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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