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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호의미술여행] 죽음을 대하는 양분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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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7-17 22:04:48 수정 : 2020-07-17 22: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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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푸생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17세기 전 유럽으로 퍼진 바로크 미술은 유독 프랑스에서만큼은 한계를 보였다. 루이 14세가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자기네 미술을 바로크 미술과 구분해서 ‘고전주의’ 또는 ‘루이 14세 양식’이라고 불렀다. 프랑스 미술이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 시대나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에 상응한다는 점을 강조해서였다. 그래서 고전적 고대의 주제나 이성적 규범을 바탕으로 균형과 절제를 중시했다.
이런 프랑스 고전주의의 중심에 니콜라 푸생이 있었다. 푸생은 고전적 고대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 로마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그곳에서 살면서 작업을 했다. 이 작품에는 그런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햇빛이 충만한 평온한 풍경을 배경으로 젊은 목동들이 석관에 쓰인 글을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 목동이 손가락으로 글귀를 짚어가고, 그 옆 한 사람은 그 모습을 내려다본다. 다른 한 사람은 옆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모두 무척 심각한 표정이다. 도대체 무슨 글이 쓰여 있을까.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나’는 죽음을 의미하며, 고대 그리스의 목가적 이상향인 아르카디아에도 죽음은 있다는 뜻이다. 젊음의 기운이 넘치든 아름다움이 가득하든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말이다. 푸생은 고대의 이런 교훈적 이야기를 시적인 풍경으로 표현했고, 전체 구도도 절제되고 단순하게 나타냈다. 인물들의 모습도 고대 인물 조각상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이 맞는 한계점 같은 것이다. 그 한계가 어디일까에 대해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주변의 죽음을 보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최근 두 사람의 죽음 앞에서 양분된 모습과 후폭풍을 보면서 나는 과연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제대로 가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됐다. 사실은 명확하게 밝혀져야 하고, 공과 과도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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