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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화영의 리플레이] 영조와 사도세자의 숙종대왕 능행길에 정말 비가 왔을까

입력 : 2015-10-04 14:12:22 수정 : 2015-10-04 14: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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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에 관한 진실과 허구


**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가 54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순항 중이다.

‘사도’는 1762년 임오년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숨진 사도세자의 이야기, 즉 임오화변을 재해석해 스크린에 옮긴 작품. 영화의 인기 덕분에 영정조시대나 사도세자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사도세자와 그의 아내 혜경궁 홍씨의 무덤인 ‘융릉’(경기 화성시)은 영화를 보고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사도세자에 대한 평가는 시대나 사가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혹자들은 사도세자가 살인과 근친상간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는 기록 때문에 그를 ‘사이코패스’로 규정한다. 또 다른 쪽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파나 정치싸움의 희생양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 ‘사도’는 ‘아버지(영조)와 갈등을 빚은 아들(사도세자)’이라는 가족사에 초점을 맞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극 중 유아인이 연기한 연민어린 사도세자 캐릭터가 지나치게 미화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임오화변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교과서, 책, 신문기사,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한 번쯤은 접해봤을 이야기이기에 더욱 평가가 갈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영화 ‘사도’에 나온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또 어디까지가 허구(상상)일까. 제작사인 타이거픽쳐스 오승현 대표에게 직접 들어봤다.



◇ 할아버지 숙종대왕릉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도세자

‘사도’에는 영조(송강호)가 아버지인 숙종의 제사를 지내러 숙종대왕릉에 거대한 행렬을 이끌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비가 퍼붓고 가마에 탄 영조의 표정은 심상치가 않다.

영조는 갑자기 행렬을 멈추고 세자(유아인)를 부른다. 세자가 전라도로 내려가는 이의경에게 ‘독서가 가장 큰 즐거움이다’라는 내용의 시를 적어 보낸 것을 괜히 트집 잡으며 세자를 돌려보낸다. 평소 공부를 게을리 하는 아들이 못마땅했던 터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마저 아들의 탓으로 돌리며 짜증을 낸다.

이 장면은 실제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다만 오 대표는 “이의경에게 보낸 시를 꾸짖는 장면은 능행과는 다른 시기에 벌어진 일인데 극적인 효과를 위해 한 데 묶은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적 표현을 위한 시간의 재구성이라 할 수 있다.

영화 후반부에는 영조가 세손(훗날 정조)을 이끌고 숙종대왕릉에 행차하는 장면도 나온다. 세자 때와는 대조적으로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맑은 날씨다. 이 장면은 작가적 상상력에 의해 나온 허구다. 실제 사도세자는 생전 단 한 번도 할아버지인 숙종대왕의 능에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사도세자가 이런 사실을 비관하며 장인 홍봉한에게 썼다는 편지도 7년 전 발견됐다. 



◇ 정조가 없었다면 사도세자는 살아서 왕이 됐을까

영화에서 인물의 감정이 최고조에 달한 신을 하나 꼽으라면 사도세자가 칼을 들고 아버지 영조의 처소를 찾아가는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이를 본 관객이라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다.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엄연한 ‘역모’가 아니던가.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가 “아모리나(아무렇게나) 해버리겠다”며 비 오는 날 칼을 들고 청계천을 지나 경희궁으로 향하다 몇 번이나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어느 정도 기록에 근거한 장면이지만, 아버지 영조의 처소 문 앞까지가 영조와 세손의 대화를 엿듣는 장면은 어디까지나 상상에서 나온 것이다.

‘사도’의 후반부는 누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깊이는 알지 못했던 이야기, 영조가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갇혀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소상히 그려낸다. 이 역시 한중록,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역사적 기록에 작가적 상상력을 덧입혀 탄생됐다. 다만, 오 대표는 어떤 역사학자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영조는 왜 아들을 죽여야 했나. 나경언과 영빈(사도세자의 생모이자 후궁)의 고변을 들은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칼을 내리며 ‘자결’을 명한다. 하지만 세자가 이를 거부하자, 영조는 의금부에 사약을 내리라고 명하는 대신 뒤주를 가져오라고 시킨다.

세자에게 사약을 내리면 역모가 성립되는 것이고, 이는 아비인 자신과 세손도 대역죄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혜경궁 홍씨 역시 아들인 세손을 지키기 위해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영조가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갇히게 한 이면에는 세손을 살리기 위한 뜻도 담겨 있었다.

대표는 “조선왕조에서 종사를 잇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만약 영조에게 세손이라는 ‘대안책’이 없었다면 사도세자를 죽일 수 있었을까. 영조는 세손을 살려 왕권을 잇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아들을 뒤주에 갇히게 해 자연사시킨 것”이라고 해석했다. 



◇ 청룡이 그려진 부채, 그리고 정조의 백룡포

사도세자는 아들(정조)이 태어나기 전 청룡이 등장하는 태몽을 꿨고, 이를 그림으로 남겼다고 한다. 한중록에 등장하는 기록이다. 그가 뒤주에 갇혔을 때 누군가 부채를 집어넣어 오줌을 받아먹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영화에는 세자의 장인 홍봉한(박원상)이 세자가 그린 청룡 그림을 부채로 만들어 이를 뒤주에 넣어주고, 또 훗날 성장한 정조(소지섭)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문근영)의 회갑연에 이 부채로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다. 이 역시 실재했던 여러 사건을 드라마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의 회갑연에서 정조가 입고 있던 백룡포(흰색 곤룡포)는 역사적 고증에 의한 것이 아닌, 정조의 슬픔과 통한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의상감독의 낸 아이디어였다.

오 대표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수원 화성행궁에서 성대하게 치러줬는데, 이 기록은 원행을묘정리의궤 등 많은 자료에 남아 있다. 아버지의 무덤에 처음 간 정조가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무덤의 풀을 다 쥐어뜯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서울에서 수원까지 능행길에 8일이 소요됐는데 이는 사도세자가 죽기까지 8일이 걸린 것과 연관이 있지 않겠나라는 추측도 있다”며 해당 시퀀스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사도세자를 바라보는 학계의 시선은 다를 수도 있다. 영화 ‘사도’를 제작하기에 앞서 어떤 한 쪽에 매몰되지 않고, 인물들의 심리와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에 초점이 맞춰졌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야기가 완성됐다”고 말했다.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사진=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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