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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 5시 훈독회… 삶이 곧 말씀이었던 분"

관련이슈 문선명 천지인참부모 천주성화(天宙聖和)

입력 : 2012-09-05 09:27:11 수정 : 2012-09-05 09:2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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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서 본 文총재] ① 황선조 선문대 총장 그분과의 첫 인연은 36년 전, 신비한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군인이었다. 1970년 중반, 그때만 해도 군대의 비상약으로 진통제마저 제대로 준비가 안 되던 시절이었다. 산꼭대기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던 중 갑작스러운 치통으로 심한 고통을 겪던 차에 새벽 비몽사몽의 한 체험을 하게 됐다. 의자에 앉은 채 고통을 참으며 새벽을 맞는데 잠깐 꿈 속에서 일면식도 없는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필자에게 입을 벌리라 했고 벌린 입 속에 큰 철퇴를 집어넣고는 막 돌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깜짝 놀라 깨었는데 사흘간 계속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거짓말처럼 씻은 듯 사라졌다. 자고 있던 동료를 깨워 이 신비한 사실을 흥분된 상태로 말하니 그는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분이 바로 문선명 총재님이었다.

필자는 그렇게 그분과 인연이 되었고 그로부터 20년 후, 1996년 명실공히 ‘간부’란 이름으로 16년간을 거의 매일 그분을 뵙고 모시며 살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같은 하늘 아래 있을 때는 항상 그랬다.

그분은 이제 멀리멀리 가셨다. 이미 당신의 가르침대로 당연히 가셔야 할 길을 어김없이 가셨다. 그러나 늘 ‘아버님’이라 불렀던 그분을 필자는 아직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청소년 시절부터 가슴에 새긴 만해 한용운의 시구 ‘임은 갔으나 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는 이제 그분에 대한 평생 내 고백이 될 것 같다.

2004년 6월 22일 전남 여수 청해가든에서 열린 훈독회를 주관하는 문선명 총재. 일본에서 온 식구(교인) 400여명이 참석했다.
선문대 제공
필자는 매일 새벽 5시 ‘훈독회’로부터 시작해서 공식행사나 비공식 소박한 일상 속에서도 수없이 총재님을 뵈며 남다른 시간을 보냈다.

‘지극히 인간적인 삶의 나눔 속에서 그분은 어떠하였던가?’라고 묻는다면 필자는 ‘헤아릴 수 없는 큰 분’이라고 답할 수 있다. 누구나 상식적 판단기준으로 그분을 뵈면 늘 다르고 예상하면 늘 빗나가는 걸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의 경험으로 그분의 삶을 말해보라면 우선 다섯 가지를 말하고 싶다.

먼저, 문선명 총재님은 ‘말씀’을 지극히 사랑하셨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삶이 곧 말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 일과가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끝난다 해도 좋을 것이다. 공식집회행사, 매일 새벽 5시의 훈독회는 두말할 나위 없고 어떤 상황에서도 곁에 사람이 있으면 말씀을 하신다. 때로는 식탁에서, 차 속에서, 걸으면서도 하시며 서너 시간은 보통이고 많게는 열 시간을 넘어선다. 내용으로는 늘 근본을 말씀하신다. 신과 인간, 세계, 역사, 자연까지 포함해서 근본에서 현실, 현실에서 영원한 세계까지를 주제로 삼는다. 그러나 일방통행은 결코 아니다. 묻고 대답하고 상대가 답이 없거나 되묻지 않으면 스스로 묻고 대답하시는 스타일이시고 진정성이 깊다. 소위 온몸으로 말씀하신다.

이뿐만 아니라 그분은 듣기를 좋아하신다. 할머니 식구(교인)가 일상적 인간사를 말해도 다 들어줄 때가 많다. 비공식 자리에서는 퍽 편하게 어떤 대화의 장도 열어 두신다.

총재님께서는 한평생 언제 어디서나 꼭 필수품 하나를 챙기신다. 혹시라도 소홀하면 강하게 채근한다. 바로 ‘당신의 말씀’을 담은 책자이다. 항상 당신의 말씀 중 핵심 되는 책자를 넣어둔 가방을 옆에 두고 계신다. 스스로 당신이 하셨던 말씀을 늘 읽으시고, 들으시고, 또다시 말씀하신다.

둘째, 그분에게는 영적 예지력이 있으셨다. 이미 검증받은 많은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공산주의가 세계로 확산해 가던 1980년대 승공운동을 전개해 오시던 중 198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도록 하시고, ‘공산주의 종언’을 선언했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공산주의가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분은 많은 제자들, 주변 학자들의 만류에도 단호하게 종언을 선언했다. 총재님께서는 이미 그 훨씬 전, 1950년부터 공산주의는 70년 생존하다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했는데 80년대 말 동유럽의 민주화 도미노에 이어 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며 이는 현실이 되었다.

이런 그분만의 혜안은 주변의 삶에서 수시로 경험하게 된다. 2000년 봄날, 어김없이 5시에 훈독회가 있었다. 훈독사(말씀을 낭독하는 분)가 시작하려 할 때 갑자기 필자에게 물으셨다. 이미 알고 계심에도 자녀가 몇 명이냐고. 확인하듯 물으셔서 둘이라고 했더니 곧 한 명 더 있을 테니 준비하라 하셨다. 당시로서 도저히 믿기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둘째가 태어나고 나서 12년이나 지났기 때문이었다. 또 그런 대화의 분위기도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보름 후 집사람의 임신이 확인되었다. 본인도 모르는 임신을 그분은 벌써 아셨고 깨우쳐 주셨으나 필자는 그것마저 그냥 스쳤다. 그분의 예지력은 나를 비롯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압도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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