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관(법원) 내부 보고는 누설에 해당하지 않는다.”(기소된 현직 법관 측 변호인)
“부하 법관을 통한 상세한 수사정보 수집은 명백한 불법이다.”(검찰)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각종 수사기밀과 체포·구속영장 청구서 정보를 제3자한테 전달한 혐의로 기소된 현직 법관들이 출정해 한목소리로 무죄를 주장했다. 검찰은 이들의 행위가 ‘명백한 불법’이라는 입장이지만 기소된 법관들은 법원 업무체계를 검찰의 조직 논리로 오인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무리한 기소’라고 맞서며 치열한 공방을 이어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부장판사 유영근)는 19일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신광렬 서울고법 부장판사와 조의연 서울북부지법 수석부장판사, 성창호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의 첫 정식 재판을 열고 검찰 측 공소사실 요지와 피고인 측 의견 등을 청취했다.
이 사건 쟁점은 2016년 ‘정운호 게이트’ 당시 신 부장판사 등이 검찰 수사기록과 각종 영장 청구서 등에 기재된 내용을 정리해 상급자에게 보고한 행위가 형법에서 말하는 ‘공무상 비밀누설죄’에 해당하는지다. 당시 서울중앙지법의 영장전담 판사였던 조의연·성창호 두 부장판사는 형사수석부장판사였던 신 부장판사에게 수사 기밀을 보고한 혐의를 받고 있다. 신 부장판사는 이들을 통해 검찰 수사 상황과 향후 계획 등을 수집한 뒤 법원행정처에 보고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신 부장판사 등은 검찰 측 공소사실 전부를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신 부장판사 측은 “‘누설’이란 기체나 액체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걸 말한다”며 “비밀이 내부에 있으면 누설이 아니고, 외부로 새어나갈 때 해당한다는 게 사전적 의미”라고 했다. 이어 “행정처는 법원의 사법행정을 맡은 내부기관이지 외부기관이 아니다”며 “기관 내부에서 취득한 수사정보를 수사 대상자 측에 전달한 경우가 누설이지, 기관 내부에서 정보를 공유한 것은 누설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신 부장판사 측은 “법관 비위사항은 법관 인사와 징계를 총괄하는 사법행정기관인 행정처도 파악해야 해 보고한 것”이라면서 “20여년간 사법행정을 담당한 지식을 토대로 비위사항을 파악해 서울중앙지법 차원에서 대응해야 하고 행정처에 보고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랜 기간 이뤄진 사법행정 관례라는 것이다. 조 부장판사와 성 부장판사 역시 비슷한 논리를 내세우며 무죄를 주장했다. 조 부장판사 측은 “(검찰이) 수석부장판사와 영장전담판사의 관계를 검사와 차장검사 관계로 오해한 것”이라고도 했다.

반면 검찰은 ‘양승태 사법부’가 법관을 상대로 한 수사가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수사기밀을 누설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수사 결과 당시 사법부가 ‘정운호 게이트’ 연루 법관의 통화 내역 확보 및 수사 상황 파악, 대응책 마련 등을 주문한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검찰 관계자는 “법원 예규상 행정처는 각종 영장 정보에 대해 결과만 간략하게 보고받게 돼 있다”며 “수사 진행 상황 같은 상세한 정보를 부하 법관을 통해 수집하는 건 명백한 불법”이라고 했다.
해당 사건 쟁점을 두고 법조계에선 뚜렷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법원 내 지휘계통을 통해 정보가 오간 행위에 대한 위법성 여부를 판단하는 건 사법부 71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어서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무리한 기소라고 볼 순 없지만 이게 처벌 대상이라고 확신하기도 어려운 사안이다. (유무죄 가능성을) 50대 50으로 본다”고 했다. 또 “공무상 비밀누설이라면 비밀을 제3자에게 알리는 건데, 제3자에 행정처나 법원 내부까지 포함되는지는 다퉈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판사들은 관행처럼 해온 일이기 때문에 이걸 비밀이 아니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반면 검찰은 비밀이라 생각했던 것이고 그 당시 문제가 됐기 때문에 비밀을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쟁점”이라고 했다.
이날 신 부장판사 등은 검찰이 공소장 일본주의를 위배했다는 종전 주장을 더는 내세우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검찰이 같은 사건에 연루된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에 대해 위법하게 증거 수집을 한 만큼, 자신들에 대한 공소도 기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찰과 변호인들은 증거 취득 경위를 놓고도 상당 시간 설전을 주고받았다. 변호인들은 검찰이 임 전 차장의 이동식저장장치(USB)를 압수하기 이전에 작성한 문건 명칭 등 증거자료의 취득 경위와 출처에 대한 위법성 의혹을 제기했고 검찰은 영장 청구 전 행정처에서 자료 요청과 열람을 동시에 한 것으로 문제될 게 없다고 맞섰다. 재판부는 다음 기일에 양측 의견을 추가로 듣고 위법수집증거 여부를 판단하기로 했다. 신 부장판사 등의 2차 공판기일은 다음 달 4일 열릴 예정이다.
배민영·유지혜 기자 goodpoint@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