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통령선거가 치러지던 지난 3일 일본 열도에선 ‘국민 영웅’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 요미우리 자이언츠 종신명예감독의 추모 열기로 뒤덮였다.
방송사들은 나가시마 감독과 연이 있는 선수 출신 등을 스튜디오에 불러 고인을 추억했고, 신문사들은 호외를 찍어냈다.

나가시마 감독의 일본프로야구 데뷔년도와 같은 1958년 완공된 도쿄타워는 평소보다 3시간 이른 오후 9시에 소등해 고인을 기렸다.
미국 메이저리그(MLB) 스타 오타니 쇼헤이(로스앤젤레스 다저스)는 인스타그램에 고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고서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고 했고, ‘고질라’ 마쓰이 히데키는 뉴욕에서 급하게 귀국해 4일 조문을 위해 고인의 자택을 찾았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고인에 대해 “정말 밝은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모두에게 희망의 별이라고나 할까. 침울해 있을 때도 나가시마씨의 모습을 보면 확 밝아지곤 했다”며 “한 시대가 끝났다는 느낌이 들어 너무 쓸쓸하고 아쉽다”고 말했다.

◆3일 오전 6시39분에 진 요미우리의 영구결번 ‘3’
일본 언론들에 따르면 나가시마 감독은 지난 3일 오전 6시39분 도쿄의 한 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했다.
요미우리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고인의 등번호 3과 사망 시각의 연관성을 두고 놀라움을 나타낸 팬들도 있었다. 기일이 바로 3일이고 사망시각 역시 3의 배수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인의 향년은 89세. 일본에서 8은 대개 ‘하치’라고 읽지만 ‘야’라고 발음할 때도 있다. 9는 ‘큐’라고 읽는다. 89를 ‘야큐’라고 읽을 수도 있는 셈이다. 야구(野球)의 일본 발음이 바로 야큐다.
네티즌들은 “등번호이기도 한 3(일) 89(야큐)세로 돌아가셨다. 뭔가 운명적인 것을 느낀다. 앞으로도 프로야구를 지켜봐 주세요”라거나 “89세로 돌아가시다니 최후까지 야구로 사랑받은 인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자신의 등번호인 3과 같은 숫자가 붙은 날, 그리고 89(야큐)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최후의 최후까지 야구의 신에게서 사랑 받은 ‘미스터 프로야구’ 나가시마 시게오씨,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도 올라왔다.

◆日 경제성장과 함께 한 나가시마의 전성기
네티즌의 글에서 보듯 나가시마 감독은 ‘미스터 프로야구’라고 불리곤 했다. 그가 일본 프로야구사에 남긴 족적이 그만큼 컸다.
요미우리신문 등에 따르면 1936년 태어난 나가시마 감독은 고교 시절까지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릿쿄대 재학 시절 도쿄 6개 대학 리그에서 홈런 8개로 신기록을 세우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58년 요미우리에 입단한 그는 데뷔전에서 4타석 4삼진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빠르게 프로 무대에 적응해 요미우리의 제25대 4번 타자 자리를 꿰찼다. 결국 그해 홈런·타점 1위에 오르며 신인왕까지 거머쥐었다.
이듬해에는 입단 1년 후배인 대만계 오 사다하루(王貞治), 즉 왕정치와 공포의 ‘ON포’를 구축했다. 그해 일본 야구 사상 최초의 ‘천람(天覽·일왕 부처가 직접 관전함)’ 경기가 열렸는데, 나가시마가 9회 말 역전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다. 큰 경기에 강한 스타 기질이 유감 없이 드러난 것이다.

요미우리는 ON포의 활약에 힘입어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일본시리즈를 9년 연속 제패했다. 마침 이 기간이 일본 경제의 고도 성장기와 겹친다. 나가시마 감독이 ‘경제대국’ 일본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 된 까닭이다.
1974년 “저는 오늘 은퇴하지만 거인군(자이언츠)은 영원히 불멸”이라는 말을 남기고 현역에서 물러난 그의 통산 성적은 17시즌 동안 2186경기 출전, 타율 0.305에 444홈런, 1522타점.
그는 1975년 요미우리 감독으로 부임했고 5번의 센트럴리그 우승, 2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일본 야구대표팀 감독을 맡았다가 2004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야구계를 떠났다.
2013년에는 마쓰이와 함께 일본 국민영예상을 받았고, 2020 도쿄올림픽 개회식 성화 주자로 나섰다. 2021년 프로야구 선수 출신으로는 최초로 일본 문화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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