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가던 장소에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 늘 만나던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인생 자체가 반복이고 되풀이의 연속이므로 이제는 굳이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어딘가로 멀리 훌쩍 떠나는 것도 좋지만 모두가 떠난 자리에 혼자 남아 있는 것도 좋다. 올봄엔 큰맘 먹고 다른 장소에서 봄을 보냈지만, 그래도 집으로 돌아오니 비로소 내 자리로 돌아온 듯 마음이 금세 밝아진다. 아마도 이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며 늘 똑같은 생활 속에서도 어느 날 문득 뭔가를 발견하고 새로운 재미에 푹 빠지는 것, 그 소소한 즐거움이 훨씬 더 친숙하고, 훨씬 더 내 삶에 풍요를 가져다준다고나 할까.
세상은 넓고, 볼 것도, 챙길 것도, 먹을 것도 많다지만 나는 느리고, 좀체 변하지 않는 내 창밖 풍경에 권태를 느낀 적은 없다. 글을 쓰기 위해서나 글을 쓰다가도 가끔 눈을 들어 바라보는 안산 아래 수많은 지붕들.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들려오는 새소리, 사람들 소리, 골목길을 오르내리는 배달 오토바이 소리에도 계절은 묻어나고, 계속 사랑할 이름들이 떠오르고, 안과 밖이 주는 내밀한 은총에 나도 모르게 더욱더 겸손해지는 나이. 굳이 내가 사는 곳이 경치 좋은 방이 아니라도 이제는 괜찮다. 정말 괜찮다. 언제든 밖으로 나가면, 나가기만 하면 경치 좋은 곳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삶을 한 번 바꾸는 데는 한평생이 걸린다지만 나는 세 번 내 삶을 바꾸었다. 부산에서의 삶, 시인으로서의 삶, 그리고 지금은 황혼으로서의 삶이다. 젊음이 유일한 이상이고 갑이고 가치인 이 시대에 황혼의 삶을 이야기한다는 건 구태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진짜 소중하고 아름답고 그리운 건 이 나이에 더 잘 보이므로 나는 지금이 정말 좋다. 물론 그동안 쌓아 올린 지혜와 내공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도 종종 겪지만, 그럴 때마다 훌훌 털고 일어나 건강하게 다시 나와 화합할 수 있는 용기도 이 삶에서 얻게 되므로 큰 상심 없이 계속 나아갈 수 있어, 마냥 고맙고 평정한 황혼의 삶. 그러니 내가 늘 열고, 닫고, 여는 내 창밖 풍경이 아무리 보잘것없다 해도 어찌 어여쁘고 자유롭지 않겠는가.
물론 나도 사회적 동물인 인간인지라 말할 수 없이 외롭고 적막하고 비통할 때도 있지만, 평소 내가 지지해 왔던 사람이 새 대통령이 되고, 그 힘으로 나라와 국민이, 경제와 문화가 더 나은 곳으로 행진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위안과 설렘이 어디에 있으랴. 게다가 활짝 열린 황혼의 창, 내 책상 위에는 아직도 읽어야 할 책, 써야 할 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내 마음속에 사랑과 우정으로 살아 있는 이들의 이름이 지천으로 피는 들꽃들처럼 다디단 바람 속에서 나를 향해 하늘하늘 손 흔들며 환히 웃고 있는데….
김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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