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드라마 ‘사랑과 야망’ 종영 직후 29세의 나이에 연예계를 떠났던 차화연은 결혼 생활과 20여 년의 공백을 거쳐 2008년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당시 김수현 작가의 대작 속에서 방대한 대사와 고강도 감정 연기를 소화하느라 촬영 내내 원형탈모증을 달고 살았던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피하듯 결혼을 택했다. 그러나 그것이 안식처가 되지는 못했다. 연예계 활동을 향한 남편의 완강한 반대는 배우로서의 자아를 완전히 질식시켰고, 그는 종갓집 며느리로 20여 년간 명절마다 70명분이 넘는 상을 차리며 가정에 매몰되는 세월을 보냈다. 복귀를 결심했을 때도 남편의 저지는 계속되었고, 결국 모든 고통을 끊어내기 위해 이혼이라는 단호한 결단을 내린 뒤에야 비로소 카메라 앞에 다시 설 수 있었다. 20년 만의 복귀 초기,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힌 그는 후덕해진 체형에 대한 냉소와 마주하며 원점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독하게 다이어트를 감행하고 연기 연습을 새로 하며 바닥부터 다시 일어선 그는 ‘하나뿐인 내편’과 ‘신사와 아가씨’ 등 연달아 주말극 흥행을 이끌며 안방극장의 여왕으로 부활했다. 31년 만에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거머쥐며 전성기를 되찾았지만, 그 찬란한 타이틀 뒤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처절한 피땀이 숨어 있었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 동반 출연한 딸 차재이는 SAT 수학 만점과 4개 국어를 구사하는 강남 8학군 브레인으로, 3만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뉴욕대 연기과에 합격한 사연을 털어놓았다. 차화연은 전교 1등을 좇는 대치동식 교육 대신 자식이 원하는 길을 지켜보는 방목형 교육을 택했다고 고백했다. 이에 차재이는 엄마가 너무 가만히 있어서 오히려 불안감에 스스로 책을 쥐었다고 재치 있게 받아치며 웃음을 자아냈다.
외고 진학 실패 후 뉴욕대 연기과 도전을 선언했을 때, 연기자의 길이 얼마나 고단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던 차화연은 울고불고 매달리며 극구 말렸다. 하지만 꿈을 향해 직진하는 딸을 꺾을 수 없었고, 결국 합격 통지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 1년에 학비만 8000만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비용은 재기한 지 얼마 안 된 차화연의 어깨를 짓눌렀다. 차화연은 과거 톱스타의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놓은 채 단역과 이름 없는 시체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닥치는 대로 3~4개의 드라마를 병행했다. 카메라 앞에서 죽은 듯 누워 있어야 하는 순간조차 딸의 학비를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 감내해야 했다. 엄마가 현장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차재이는 가슴이 찢어지는 죄책감 속에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계절학기까지 강행하며 조기 졸업을 이뤄냈다.
그렇게 악착같이 버텨낸 끝에 뉴욕대를 조기 졸업한 차재이는 귀국 후 13년 차 배우의 길을 걷는 동시에 작가로서 세 권의 책을 출간하며 스스로의 영역을 넓혀갔다. 특히 엄마의 파란만장한 삶과 자신의 유년 시절을 지탱해 온 기억들을 글 속에 녹여내며 대중에게 짙은 여운을 남긴 그는, 모친의 그늘에 기대지 않고 온전히 자기만의 서사를 구축해 냈다. 어머니가 현장의 밑바닥에서 생니를 뽑듯 지켜낸 시간들이 결국 자식에게는 한순간도 나태해질 수 없는 무서운 자극제이자 단단한 뿌리가 된 셈이다. 카메라 뒤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엄마와, 그 헌신을 거울 삼아 자신만의 명맥을 개척해 낸 모녀의 분투는 뼈아픈 희생을 거쳐 비로소 찬란한 연대로 완성되었다.
허울뿐인 타이틀 뒤에 가려진 시련은 단순한 미담을 넘어 날것으로 살아남은 한 인간의 생존기에 가깝다. 이혼이라는 단호한 결단을 내리며 홀로 견뎌낸 세월, 그리고 자식의 성취를 위해 스스로를 낮추며 현장의 밑바닥까지 기꺼이 받아들인 엄마의 태도는 묵직한 잔상을 남긴다. 거친 풍파 속에서도 자신이 디딘 땅을 끝까지 사수해 낸 그 질긴 끈기는, 결국 오랜 공백을 스스로 돌파해 낸 배우 차화연의 이름 석자를 온전히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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