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고립가구 밖으로 이끈 ‘한 끼의 힘’… “이젠 내가 베풀 차례” [심층기획-닫힌 문 너머]

관련이슈 세계뉴스룸

입력 :
장한서·이지민·구예지 기자

인쇄 메일 url 공유 - +

<4회> 또 다른 나에게 내미는 손

서울 대학동 ‘고시촌 공동체’ 가보니

고시생 빠져나간 마을에 중장년 1인 가구 몰려
시민단체 ‘해피인’ 등 수년간 무료 점심식사 제공
밥 친구 사귀고 활기… 더 어려운 주민들 돕기도
민간 후원 의존 한계… “정부·지자체 지원 필요”
“맛있게 드세요. 몸은 좀 어때요.”
주민들이 19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에서 시민단체 길벗사랑공동체 ‘해피인’이 점심에 무료로 나눠 주는 도시락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남정탁 기자
주민들이 19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에서 시민단체 길벗사랑공동체 ‘해피인’이 점심에 무료로 나눠 주는 도시락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남정탁 기자

19일 오전 11시30분 서울 관악구 대학동주민센터에서 언덕길을 따라 10분 남짓 올라가자 골목에 밥 짓는 냄새가 번졌다. 9년째 이웃들에게 점심을 무료로 지원하는 시민단체 길벗사랑공동체 ‘해피인’이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하나둘 모여든 주민들이 도시락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금세 20여명으로 늘었다.


이날 메뉴는 버섯탕에 가지볶음, 오이무침 등. 6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는 10여명의 봉사자가 쉴 새 없이 밥과 반찬을 도시락에 푸짐하게 담았다. 박보아 해피인 대표는 도시락만 건네지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살피며 “몸은 좀 어떠세요”, “잘 지내셨어요”라고 안부를 물었다. 한 남성은 “건강해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이곳에서 다시 언덕으로 1분을 더 올라가자 한 고시원 건물 1층에 중장년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가 운영하는 ‘참소중한센터’에서 이영우 신부가 계란프라이를 올린 볶음밥을 나눴다. 중장년들은 둘러앉아 서로 안부를 물으며 이 신부에게 “맛있어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한 끼가 만든 ‘고시촌 공동체’

대학동은 한때 사법시험과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청년들이 모여 살던 ‘고시촌’이었다.

시험제도가 바뀌고 청년들이 빠져나간 뒤 값싼 고시원과 작은 원룸에는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중장년 1인 가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비탈을 오르는 윗동네는 방값이 더 저렴해 중장년 남성과 노인들이 모였다.

상당수가 가족과의 단절을 경험하고 생활고와 병고를 겪는 이들이다. 박 대표는 “고립사가 어느 지역보다도 많이 발생하는 곳인데, 문을 닫고 지내니 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며 “지원할 자원이 있어도 당사자와 연결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고 말했다.

26일 관악구청에 따르면 기초생활보장 및 서울형기초생활 지원을 받는 대학동의 복지 대상자는 지난달 기준 1956명이다. 2020년 682명의 약 3배 수준이다. 대학동은 1인 가구 비율이 79%나 된다.

해피인의 무료 도시락은 고립된 당사자를 찾아내는 접점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직접 찾아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들을 문밖으로 불러낼 가장 현실적인 매개가 ‘한 끼의 밥’이라고 판단했다.

 

해피인이 19일 준비한 도시락. 남정탁 기자
해피인이 19일 준비한 도시락. 남정탁 기자

2017년 10월 문을 연 해피인에는 현재 월·수·금이면 하루 150명 안팎이 도시락을 받으러 온다. 7월 한 달 동안 한 번이라도 찾은 주민은 216명, 한 달 제공되는 식사는 약 2000끼다. 박 대표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며 “우리가 밥을 주는 건 혜택을 주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단지 음식만 제공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여긴 해피인은 밥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이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동네 밀착형’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참소중한센터 옆에 고시촌 주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었다. 당사자 자조 공동체 ‘윗말주민협의회’도 꾸렸다. 식사 지원을 받는 주민들이 관계를 맺고 또 다른 이웃을 돌보거나 마을 자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고립 정도가 심해 밖을 나오지 않는 이웃의 식사를 위해 또 다른 1인 가구 중장년이 도시락을 직접 배달하기도 한다. 집 청소를 돕거나 아픈 이웃과 병원에도 동행한다.

해피인은 2021년부터 안부 애플리케이션(앱)까지 만들어 방문자들의 데이터를 모아 관리하고 있다. 앱에는 식사 지원 횟수와 건강 상태, 방문하지 못한 이유 등을 기록한다. 평소 오던 주민이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직접 연락해 안부를 확인한다. 앱에 등록된 인원만 850명이다.

무료급식은 공공복지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도 한다.

해피인은 처음 온 주민을 등록하고 각종 복지제도와 구청·복지관 프로그램 등을 안내한다. 이날 처음 찾아온 30대 남성에게도 청년 대상 프로그램 등이 적힌 안내문을 건넸다. 민간 공동체가 고립된 주민과 공공서비스 사이의 ‘허브’ 역할을 하는 셈이다. 박 대표는 “최근에도 복지제도를 잘 모르는 사람이 주거 급여 등을 알게 돼 임대주택에 간 경우가 있다”고 귀띔했다.

 

주민들이 19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 참소중한센터에서 무료 점심을 먹고 있다. 참소중한센터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가 운영하는 공동체 공간이다. 남정탁 기자
주민들이 19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 참소중한센터에서 무료 점심을 먹고 있다. 참소중한센터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가 운영하는 공동체 공간이다. 남정탁 기자

◆‘받는 사람’에서 ‘주는 사람’으로

60대 이해두씨도 도시락을 받아가던 주민이었다. 1인 가구인 그는 2년여 전 해피인을 알게 됐고, 지난해부터 봉사에 나섰다. 지금은 이용자들의 이름과 출석을 확인하고 몸 상태와 기분을 묻는다. 평소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나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는지 살핀다.

이씨는 다리가 불편하다. 하지만 거동이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직접 도시락을 들고 나선다. 척추질환으로 잘 걷지 못하거나 뇌 수술 뒤 외출이 어려워진 주민을 위해서다. 이씨는 “나도 받아가는 사람이다. 받으니까 베풀려고 하는 것”이라며 “서로 오고 가며 알게 되니 이제는 만나면 다 인사한다”고 했다.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의 경계가 흐려지는 흐뭇한 순간이다.

최근에는 참소중한센터를 오가며 인연을 맺은 중장년 1인 가구 주민들이 결혼하는 경사도 있었다. 지난달 6일 센터에서는 이웃과 봉사자들의 축하 속에 이들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하는 공동체 결혼식이 열렸다.

이영우 신부는 “고립사 예방과 서로 돌봄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길웅(51)씨에게 이곳은 끼니를 해결하는 곳에서 사람을 만나는 곳이 됐다.

지난해만 해도 이씨는 사흘 굶는 게 흔한 일이었다. 수입이 끊기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시기다. 갈 곳이 없어 동네 어린이공원에 앉아 있던 그는 우연히 주변에서 “도시락을 나눠 주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무료로 밥을 먹는 걸 창피하고 비굴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흘을 굶으니까 일단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해피인을 찾은 이씨에게 관계자들은 거리낌 없이 말을 걸었고, 인근 참소중한센터도 알려줬다.

전남광주 목포시에서 살다 30대 초반 홀로 서울로 올라온 이씨는 식당 배달과 만화방, 건설 일용직, 택배 상하차 등을 했지만 오래 일하지 못했다. 갈등을 겪은 가족과도 8~9년째 연락이 끊겼다. 고시원 방은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가는 1.5평 남짓. 식사는 라면과 냉동만두 같은 인스턴트 음식으로 버텼다. 지난해에는 수입마저 끊기며 끼니까지 거르게 됐다. 깊은 외로움에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생계급여나 의료급여를 알아봤지만 신청 과정이 번거롭고 자존심도 상해 포기했다. 주민센터에서 여러 공무원이 자신의 지원 가능 여부를 앞에서 논의하는 모습을 보며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고 했다.

해피인과 참소중한센터는 달랐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느낌보다 그냥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는 곳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사람 관계였다. 이곳에서 알게 된 이웃들과 카페에 가거나 맥주도 마신다. 이씨는 “다음에 만나면 뭐하고 놀지 생각한다”며 “지금은 외롭지 않다”고 말하며 미소지었다.

 

◆“공동체 공간, 골목으로”

이 같은 공동체의 운영이 상당 부분 민간의 후원과 봉사에 기대고 있다는 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해피인은 식사와 공간 운영비 대부분을 후원으로 충당한다. 한 달 식비만 300만~400만원이 들지만 지자체 지원은 공모사업에 따라 해마다 달라진다. 박 대표와 사무국장 등 단체 관계자들은 별도의 월급 없이 활동하고 있다.

박 대표는 고립 위험이 큰 1인 가구 밀집지역에 ‘지역밀착형 1인 가구 지원센터’가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복지관과 보건소가 주민에게 ‘기관으로 찾아오라’고 요구하기보다 사람들이 이미 자연스럽게 모이는 공간으로 기관이 찾아와 상담과 의료·정신건강·주거 지원 등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기관에 가는 것 자체에 낙인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다”며 “고시원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그 한가운데 지원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고립사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송인주 스스로랩 대표도 고립 위험군 발굴과 관계망 형성을 위해서는 이들을 위한 공동체가 골목 안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조직이 지속될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가 최소한의 운영 여건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고립 위험군은 동사무소나 복지센터 등을 직접 찾지 않는다”며 “식사나 빨래 등 그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을 동네에 갖추고, 그곳에 사회복지사나 공무원이 직접 찾아가 이들을 살피고 서비스에 연결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오피니언

포토

김시아 '단발 여신'
  • 김시아 '단발 여신'
  • 안유진, 순백 드레스 자태
  • 지수, '클릭' 부르는 미모
  • 한소희 '금발 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