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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어본 적 없는 풍경 [유선아의 취미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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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맞이해 시골 할아버지 댁에 내려온 이안(한지안)은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시끌시끌한 밤이 지루하다. 이안의 아빠는 일로 바빠 명절 당일에만 내려올 예정이지만 그 사이에도 이안의 엄마와 고모, 숙모는 낡은 부엌에 모여 명절 음식을 일찌감치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동네 남자 여럿을 마당에 불러서 그해의 풍작을 축하하는 한상을 차린 할아버지의 예스러운 집에는 귀신이 음식을 축내지 못하도록 막는 부적이 곳곳에 붙여져 있다. 직접 기른 메밀로 쑨 뿌연 묵은 할아버지의 자랑인데 이안은 메밀묵을 싫어해 억지로 먹거나 몰래 버리기 일쑤다. 할아버지는 메밀묵이 고모 해린(박세재)과 같은 몽유병을 앓는 이안을 낫게 해줄 거라 말한다. 성묘하러 갔던 이안은 산길에서 할아버지가 나무에 묶어 놓은 부적을 따라가다가 버려진 집 한 채를 발견한다. 이안은 비닐봉지 안에 가득한 메밀묵 한 조각을 꺼내 집 앞에 내려놓고 어떤 존재에게 바치며 인사를 전한다. 그러자 이안의 뒤에서 푸른 한복을 입은 도깨비가 모습을 드러낸다.

 

김정민 감독의 단편 ‘메밀묵’은 고모 해린과 조카 이안을 중심에 두고 펼쳐지는 이야기다. 남자아이인 이안과 고모의 관계가 각별해 보이는 이유는 집안 내력처럼 두 사람에게 몽유병 증상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안은 고모가 예전에 쓴 한 권의 동화책 ‘도깨비’를 좋아해서 고모처럼 동화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메밀묵이 먹기 싫은 나머지 음식을 훔쳐 먹는다는 잡귀가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할아버지의 부적을 찢어버린 이안이 낮에 도깨비를 만나고 돌아온 날 밤부터 고모의 몽유병 증세는 더 심해진다. 메밀묵을 모조리 밖에 내다 버렸다는 사실을 안 할아버지는 이안을 불러다 집안의 여자에게 이어지고 있는 이상한 내력을 들려주고 부적 한 장을 건넨다.

 

‘메밀묵’은 33분 길이의 단편이지만 각 인물이 가진 서사와 의미가 섬세하게 얽혀 교차하는 영화다. 이안은 늘 남자 어른들과 함께 부엌 밖에 있지만 집안의 여자들은 부엌에 모여 있다. 할아버지가 만든 메밀묵과 엄격한 집안의 분위기는 이안과 고모를 숨죽이게 한다. 이안은 먹기 싫은 메밀묵을 삼켜야 하고 고모는 동화책을 계속 써나갈 수 없다. 단편 ‘메밀묵’은 가부장제와 한 소년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어떤 전통과 내력을 익숙한 듯 낯선 도깨비 설화와 뒤섞고 있다. 단편 영화에서 쉽게 만나보기 힘든 소재와 공간은 고운 색채의 한복을 차려입은 도깨비, 고택,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 언덕의 장면으로 드러나며 영화에 한국적 고풍스러움을 더한다.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짙은 향토성은 어떤 이에게는 그리운 지난날의 풍경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겪어본 적 없는 시절과 장소를 향한 향수로 다가온다.

 

유선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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