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뒷골목의 한인 홈리스들
이민자 마이너리티에 약물중독까지
서글픈 삶 위로 중첩되는 빛나던 시절
이민자 입장에서 따뜻하게 보듬어
사랑과 여행 사이서 고민하는 여성
강인한 자아의 주인공 단골로 등장
사랑, 욕망, 염원… 모든 감정에
죽을 때까지 충실 하고픈 모습 표현
유튜브를 천천히 서핑하고 있던 그의 눈길이 한 영상에 멈춰 섰다. 뉴욕의 한인 홈리스와 이들을 위한 노숙자 쉼터를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영어를 말하는 한인 홈리스가 많다는 것도 충격적이었고, 이들이 대체로 약물 중독자였다는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뉴욕의 압도적인 화려함과, 그 뒷골목의 노숙자라니. 이민자 마이너리티에, 약물 중독자 홈리스라는 모순이 중첩되면서 그들의 삶이 서글퍼 보였다. 4, 5년 전, 소설가 반수연은 이 이야기를 언젠가 소설로 쓰리라고 생각했다.
뉴욕 이스트리버가 마주 보이는 윌리엄스버그 해안에는 과거 큰 설탕 공장이 있었다. 근처에 아들이 살기에, 그는 자주 그곳을 산책했다. 설탕공장이 있던 곳은 지금은 월세 천만 원이 넘는 고가 오피스가 즐비한 신흥 주거지가 됐다. 공장에 있던 의자는 근처 공원에 소품으로 비치돼 있었다. 설탕 공장 노동자들이 일구어 놓은 유산을 자기 것인 양 소비하는 모습이라니. 그런데 그곳에서 몇 블록만 가면 홈리스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 한인 노숙자들과 설탕 공장에 있던 곳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단편 소설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가 그에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소설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는 동두천 기지촌에서 살다가 남편 조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온, 노년의 홈리스 여성 애나의 이야기다. 노숙자 쉼터에서 밥을 해주던 애나는 어느 날 쉼터 기부자 가운데 한 명인 김 교수의 자립을 도와주는 일을 맡게 된다. 한글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애나는 김 교수를 돌보면서 영어를 뜨문뜨문 연습하고 빠진 치아를 새로 해 넣기로 하면서 문득 지친 삶 속에서 잊고 있던 욕망을 꿈꾼다.
“교수님, 오늘 지는 틀니를 끼우러 갈 끼라예. 아래위 다 틀니로 해넣기로 했다꼬 말씀드릿지예. 이가 몇 개 없으니까 오히려 치료가 더 쉽더라꼬예. 애나가 인자 겁나 이뻐지낌미더. 그라마 지랑 커피 한잔 잡수로 가입시다. 지가 교수님 커피 한잔 사드릴라꼬예. 요기 앞에 과테말라 커피집에 찰리라는 아가 있어예. 그아는 눈이 똥그랗고 머리가 굽슬굽슬한 기 참말로 이삐게 생겼어예. 교수님, 와 말이 없노. 잠미까?”
캐나다에서 거주 중인 한인 작가 반수연이 욕망하는 ‘불온한 경계인’의 모습을 놀랍도록 생명력 있게 그려낸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를 비롯해 7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 ‘파트타임 여행자’(문학동네)를 들고 돌아왔다. ‘파트타임 여행자’는 아무리 오래 여행하더라도 집을 남겨두고 온 사람을 가리키고, 돌아갈 집조차 없는 경우 ‘풀타임 여행자’라 부른다.
이번 소설집에는 동두천 기지촌 출신 이민 여성의 브루클린 분투기인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를 비롯해 표제작 ‘파트타임 여행자’, 2024년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조각들’ 등 2021년부터 4년간 발표한 작가의 단편들이 담겨 있다.
각 작품에는 작가의 삶과 경험을 반영하듯 이민자와 경계인들의 서사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가히 영화 ‘미나리’와 이민진의 장편소설 ‘파친코’처럼 장르와 국경을 막론하고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경계 위의 한인들 이야기의 확장이자 심화가 아닐 수 없다.
반 작가는 왜 이민자를 비롯해 경계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야만 했을까. 그가 그린 이민자와 경계인들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갈급한 질문들을 앞에 놓고, 잠시 방한한 반 작가와 지난달 17일 서울 용산 사옥에서 마주 앉았다.
―소설집을 여는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의 애나는 욕망에 당당한 매력적인 노인 이민자인데.
“제가 저 자신을 너무 투사했는지 모르겠다. (작가의 페르소나라는 얘기인가) 네. 애나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렇게 매력적인 노숙자가 있을까) 있더라. 노숙자를 한 개인으로 봤을 때는, 그들에게도 욕망이 있고, 서사도 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사회가 밀어붙인 것도 있었다. 이 소설을 쓰게 된 중요한 계기 가운데 또 하나는 군인을 따라 미국에 가서 살다가 사라져버린 여자들이다.”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가 이민자 사회 내부의 계급이나 젠더 차이를 조명했다면, 2024년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조각들’은 이민자 부녀의 세대 차이와, 그럼에도 함께 건너야 할 수밖에 없는 공동의 아픔을 세밀히 묘파하는 작품이다. 이민자 부녀는 딸 지나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캐나다 밴쿠버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마지막 로드 트립을 떠나면서 서로 어떻게 세상에 살아왔는지를 직시하게 되는데.
―이민자들의 세대 문제를 묘파한 ‘조각들’은 어떻게 나왔는가.
“이십대 딸이 미 서부 샌프란시스코로 취업해 이사를 가던 2023년 봄, 이른 새벽에 짐을 싣고 샌프란시스코까지 함께 로드 트립을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한국의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 가듯 생각하고 갔다. 근데, 막상 가보니, 딸 역시 이민자였다. 예를 들면, 미국과 캐나다는 추수 감사절이 약간 다른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캐나다에서 취업 온 친구들끼리 모여 추수 감사절 파티를 하더라. 제가 이민 와서 추석이면 친구들과 모여 빈대떡을 부쳐 먹던 생각이 나더라. 이민의 경험을 느끼지 말라고 열심히 키웠는데, 결국 이렇게 된 게 아이러니하고 이상했다.”
표제작 ‘파트타임 여행자’는 인연들을 잃고 홀로 미국 국립공원 일주를 떠난 여성 ‘민’의 트레일 여행기다. 가족 제이크는 물론, 인연들이 곁을 떠난 뒤 홀로 국립공원들로 여행을 떠난 민은 삶이 곧 상실의 과정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을 직면할 때 비로소 삶을 긍정할 수 있다는 진실에 닿게 된다.
―‘파트타임 여행자’에서도 아름답고 강한 단독자를 열망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한국 분이냐.’ 2018년쯤 미국 국립공원 캠핑장에서 가족끼리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여성이 다가왔다. 국적을 가늠할 수 없는 동양인의 얼굴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60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은퇴를 하고 40만 킬로를 뛴 자동차를 몰고 혼자 7개월 동안 집에 돌아가지 않고 여행하고 있다고 하더라. 소설에선 남자친구가 오지 않지만, 실제론 남자친구는 왔다. 사랑에 정착해야 하나, 아니면 오랜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떠나야 되나. 갈등을 하면서도 여행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충격적이었고, 멋있어 보였다.”
1965년 통영에서 태어나고 서른셋에 밴쿠버로 이주한 반수연은 2005년 단편소설 ‘메모리얼 가든’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소설집 ‘통영’을 발표했고, 산문집 ‘나는 바다를 닮아서’도 펴냈다.
오전 7, 8시쯤 일어나 먼저 커피부터 간다. 이미 남편은 출근한 상태. 한두 시간 정성스럽게 아침을 준비해 먹은 뒤, 산책을 나간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숲에서 숲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10㎞ 정도 걷기도. 오후 4시쯤 남편이 퇴근하면 저녁을 만들어 함께 먹고 영화를 보거나 각자 책을 읽는다. 남편은 일찍 자고, 그는 밤 12시에 눈을 감는다. 침대 옆에는 한국에서 사 온 책들이 주로 올라와 있다.
글을 쓰는 시간은 주로 오후. 카페에 갈 때도 있고 집에서 쓸 때도 있지만, 약간의 강제를 위해 카페에서 쓸 때가 더 많다. 먼저 책상 위를 정리한 뒤, 노트북을 켜고 뉴스나 페이스북도 들어간 뒤, 한글 파일을 연다. 하루 서너 시간씩 글을 쓴다. 멋 내지 않고, 진솔하게, 무엇보다 지치지 않고. 그리하여 21세기 ‘노인 혁명’의 깃발을 올리는 멋진 이민자 노인을 탄생시키고야 만다.
“나는 그 불확실성 속에서도 죽을 때까지 산 사람이 할 법한 것들을 하고 싶다. 춤추고, 노래 부르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만지며 살고 싶다. 연애소설을 읽으며 불온한 상상을 하고, 지나갔으나 지나가지 않은 시간을 떠나보내고, 떠나보내며 울어도 보고 싶다. 욕망했으나 저절로 말라비틀어져 버린 것들을 한 번쯤은 매만지고 싶다. 그게 도대체 누구에게 해를 가하는 일인가.”(‘춤을 춰도 될까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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