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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웅의역사산책] 박은식이 꿈꾼 세상은 언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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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1-03 23:05:03 수정 : 2025-11-03 2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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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의 통섭은 실천적 지식인의 통섭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 개조 꿈꿔

1925년 11월 4일 여러 신문에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이 사흘 전인 11월 1일 오후 7시 먼 길을 떠났다는 부음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는 그가 황성신문의 주필이라든가 서북학교장, 독립신문사 사장과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다는 약력이 소개되었다. 다만 그의 출생지가 황해도 황주임에도 평안북도 영변으로 잘못 소개하였으며 그의 출생 연도가 1859년생임에도 미처 달지 못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11월 5일 모 신문은 추도사에 그가 계신 곳이 “조선사람이란 비애도 없을 것이며 차별도 없고 조선사람이나 어느 나라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의 세계일 것이다. 절대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계일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넣었다. 당시 일제의 검열을 의식하여 백암이 독립운동가였음을 차마 소개하지 못하고 이런 방식의 기사로 식민지 조선이 처한 현실을 꼬집으며 백암이 꿈꾸었던 모든 민족이 ‘절대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계’를 부각시켰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필자가 백암의 저서를 제대로 접한 것은 군 복무 시절이었다. 대학원 합격 소식을 들은 직후 군에 자원입대하였고 얼마 뒤 병장으로 진급하자마자 진중문고(陣中文庫)에 눈이 갔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책이 ‘한국통사(韓國痛史)’였다. 학부 시절에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던 이 책이 여기서는 왜 이렇게 반가웠는지 몰랐다. 전역을 앞둔 병영 생활의 여유이기도 하거니와 전역 이후 대학원 복학을 앞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훗날 군산대 전임강사 시절 국사강독 교재로 이 책을 선택하고 학생들과 함께 원문을 정독하면서 이 책의 매력에 심취했다. 이후 2004년 서울대로 옮긴 뒤 규장각고전총서 기획위원회에서 근대 고전으로서 이 책의 가치를 언급하며 역해(譯解) 대상으로 추천했고 결국 필자가 맡아 발췌 역해본을 출간했다.

그러나 역해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백암은 필자가 알고 있는 역사학자와 언론인, 독립운동가를 넘어선 통섭인(通涉人)으로 다가왔다. 그는 주체적인 근대 인간상을 수립하려 했던 양명학자이자 ‘사범(師範)은 모든 학문의 뿌리’라고 역설했던 교육자였다. 그런데 백암의 통섭은 유학의 이상적인 군자(君子)로서 갖추어야 할 통치교양으로서의 통섭이 아니었다. 그의 통섭은 산업화와 주권국가 수립을 추구하고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꿈꾸었던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통섭이었다. 특히 그가 한성사범학교 교관과 사범야학교 교장, 대종교 동창학교 교사를 거치는 동안 저술하거나 번역하였던 한문교재와 역사교재는 미래 세대를 반듯하고 자주적 인간으로 키우고자 했던 백암의 열정과 정성이 들어간 실천의 산물이었다. 이후 노령과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펼치던 백암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로 안착하여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했다.

‘한국통사’에서는 망국의 역사를 통절하게 성찰하는 가운데 한민족이 국권을 되찾을 수 있는 역사적 근거와 문화적 저력을 설파했다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3·1운동을 통해 확인된 민족의 실천적 역량을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고 한국인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하였다. 나아가 그는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개조를 꿈꾸며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 오기를 학수고대하였다. 그러나 백암이 서거한 지 100년이 되었음에도 혐오와 질시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가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백암이 꿈꾸었던 세상은 언제 올 것인가.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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