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초원 문명의 부흥 촉발
16세기 북미 전파됐다고 알려진 말
수백년 전부터 원주민 활용 주장도
인간 아닌 가축 중심의 역사서 독특
말발굽 아래의 세계사/ 윌리엄 T 테일러/ 김승완 옮김/ 사람in/ 2만4000원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많은 이가 프랑스 쇼베 동굴 벽화의 들소를 떠올리겠지만 사실 가장 많이 그려진 동물은 말이다. 유럽 구석기 예술 작품에서 4700점 이상의 이미지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말이 전체 동물 이미지 중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인간과 말의 관계는 인류사를 영원히 바꾸었다. 가축 가운데 가장 뛰어난 속력과 힘을 지닌 말은 특유의 마력(馬力) 덕분에 일찍이 3000년 전 인류 경제와 문화의 중심부에 자리했고 수천 년간 세계사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유라시아·북미·남미 대륙 유적지에서 말의 가축화를 연구해온 고고학자인 저자가 쓴 ‘말발굽 아래의 세계사’는 인류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 말을 중심으로 그 장대한 역사를 조명한다. 더불어 말의 종적 기원에 대한 탐구를 시작으로 말과 인간이 수천 년 동안 함께 종횡무진해온 역사적 장소 곳곳을 보여준다.
책에 따르면 말타기는 동아시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말 문화와 기마 전투가 대세가 되면서 중국도 말 등에 올라타는 말타기를 받아들였다. “중국 통일 과정에서 말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지표를 진나라의 정복 전쟁을 지휘한 진시황의 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시황 사후에 병사 개개인을 복제한 테라코타 모형 수천 개가 들어가는 거대한 능이 건설되었다. 그 안에는 전차 부대 모형과 150개가 넘는 실물 크기의 기마용 말 등 말 모형 수백 개도 함께 묻혀 있었다. (…) 진시황릉에는 테라코타 말 모형만이 아니라 실제 말도 있었다. 진시황릉의 부장품 매장지에서 출토된 말 24마리의 뼈를 분석한 최근 연구 결과는 기마용으로 사용되던 키가 큰 성체 수컷들이 선택되어 묻혔음을 보여준다.”(175∼176쪽)

말의 가축화는 교통수단으로서의 혁신과 함께 시작됐다. 길든 말은 목축민들의 운송에 이용되면서 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역의 고대 사회로 퍼져 나갔다. 속력이 빠른 말을 제어하기 위해 굴레와 재갈 그리고 가벼운 바퀴살이 발명됐고, 말과 새로운 수레 덕분에 목축민의 이동성은 더욱 확대됐다.
저자는 특히 유라시아 대륙에 주목한다. 말 가축화와 말타기는 스텝 르네상스(유라시아 초원 문명권의 부흥)를 촉발했다. 스텝문화는 말을 전투에 활용하게 되면서 기마 전쟁을 치렀고,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농경문화의 지정학적 권력을 가져올 수 있었다. 13세기 몽골 제국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은 스텝의 통치 조직들이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유라시아 스텝 지역이 문화, 경제, 세계적 중심지로 거듭나면서 말의 수요는 더욱 늘어났다.

16세기에 식민지 사업과 해상 교역이 번성하면서 말은 세계로 더욱 확산됐다. 유럽의 남아메리카에서 식민지화에 동반한 길든 말은 남미 내륙의 원주민 사회에 뿌리내렸고 원주민들의 생활에 변화를 촉발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도 말은 운송, 농사, 군사 분야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처럼 몽골의 항가이산맥에서 아르헨티나의 팜파스에 이르기까지 말은 세계를 가로지르며 역사를 만들어왔다.
책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북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의 말 문화에 대한 재해석이다. 기존 역사학은 말이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처음 북미에 전해졌다고 본다. 그러나 저자는 DNA 분석과 연대측정 결과를 들어, 원주민들이 그보다 훨씬 앞서 말을 접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말의 재도입 시기가 1680년 ‘푸에블로 반란’ 즉 뉴멕시코 지역에서 선주민 푸에블로족이 스페인 통치와 가톨릭 강요에 반발한 대규모 반란 이후가 아니라, 수십 년 내지 수백 년 앞당겨질 수 있다는 것. 이는 북미 원주민 문화의 자생성과 창의성을 새롭게 조명하게 한다.
저자는 최신 과학기법을 활용해 말과 인간의 역사적 변화를 실증한다. 고대 말의 뼈에서 콜라겐 단백질을 추출해 기후 변화를 추적하고, 말 이빨의 마모 흔적을 통해 고삐 사용 여부를 판별한다. 이러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저자는 말과 인간의 관계를 ‘정복의 서사’가 아닌 ‘공진화(coevolution)의 기록’으로 바라보고 있다.
책은 ‘비인간 중심의 역사서’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인간이 문명의 주체라면, 말은 그 문명의 가속 장치였다. 저자는 말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 사회를 움직인 ‘행위자’로 간주한다. 말이 없었다면 농경의 확산도, 대륙 간 교류도, 제국의 팽창도 지금과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발로 문명을 세웠다고 믿지만, 실은 말의 발굽 위에서 달려왔다는 점을 시종 강조한다.
저자가 전하는 소회다. “어느덧 저무는 석양빛 아래 홀로 말을 타고 가축 무리를 돌보는 사람의 모습이 시간을 초월해 눈앞에 나타난다. 그 모습은 마치 사람과 말의 연결,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 온전히 살아 있는 듯, 말발굽 소리가 바위에 새겨져 메아리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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