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에게 징역 4개월을 선고합니다. 다만 1년간 형의 집행을 유예합니다.” 지난해 6월27일,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형사7단독 김정태 부장판사는 야간 건조물 침입 절도 혐의를 받는 70대 남성 A씨에게 이같이 선고했다. 그런데 선고가 이뤄진 곳은 법정이 아니었다. A씨가 입원 중인 경기 고양시의 한 요양병원이었다.
A씨는 야간에 야외 의류매장에서 23만원 상당의 바람막이 등 옷 6벌을 훔친 혐의로 기소됐으나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소재도 불분명했다. 알고보니 A씨는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뇌출혈로 요양보호사의 도움 없이는 거동과 일상생활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재판부는 A씨가 법정 출석이 어려운 상황을 고려해 ‘필요시 법원 외 장소에서 재판을 열 수 있다’고 규정한 법원조직법 조항에 따라 법원장의 허가를 받고 요양병원에서 재판을 열었다.

지난해 우리나라가 65세 이상이 총 인구의 20%를 초과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가운데, A씨 재판 사례처럼 사법부가 고령자의 사법접근권(분쟁을 사법절차를 통해 해결할 권리)을 제고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노화로 신체적·정신적 기능이 감소하는 고령자는 직접 법정에 가기 어렵거나 변호인을 선임하기 어려워 사법접근권 측면에서 사회적 약자의 지위에 놓이게 되는 만큼 이같은 특성에 맞춘 체계적인 지원이 절실하다는 의견이다.
6일 법조계에 따르면 사법정책연구원(연구원)은 최근 ‘고령자의 사법접근권 제고 방안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선 고령자에 대한 사법접근권 지원 현황과 향후 지원 방안 등이 제시됐다.
경제적·사회적 약자인 고령자들은 사법접근성 측면에서도 약자에 속한다. 법원행정처가 2018년 실시한 ‘사법수요 현황 조사 및 사법접근성 제고방안 연구’에 따르면 60세 이상 고령자들은 돈, 채무, 주거, 가족 등 일상생활과 밀접히 관련된 법적 문제를 겪으며 △경제적 부담 △온라인 정보접근성 부족 △자신감 결여 등으로 법적 정보나 자문을 구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령 인구의 증가와 함께 고령 범죄자와 범죄피해자는 가파르게 늘어난 상황이다. 고령자가 일상에서 법적인 문제를 마주하는 상황이 사회 전반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2007년 61세 이상 고령 범죄자는 8만4208명으로 전체 범죄자의 4.2%에 불과했으나 2022년에는 23만857명으로 17%였다. 범죄피해자 수는 2007년 9만5178명(8.5%)에서 2022년 17만3056명(11%)으로 증가했다. 특히 같은 기간 고령자 대상 폭력범죄는 2배, 사기·횡령 등 재산범죄는 4배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물리적·심리적으로 법원 문턱을 넘기 힘든 고령자의 사법접근권을 지원하고 헌법상 재판청구권, 평등권, 행복추구권 등을 보장하기 위해선 제도 개선과 적극적인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보고서는 강조했다.
보고서는 각급 법원에 고령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법지원을 전담할 ‘고령자 등 사회적 약자 지원관’을 배치해야 한다고 밝혔다. 소송 초기 단계인 소장 접수단계나 공소 제기단계에서부터 사법지원이 필요한 고령자인지 여부를 식별하고, 고령자의 사법지원 요청 내용을 담당 재판부에 신속하게 전달하며 재판부에 지원 관련 적절한 조언을 제공하는 등 업무를 전담할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신체적·정신적 기능 저하로 재판절차에 당사자나 증인으로 출석하기 어려운 고령자를 위해 재판부가 ‘찾아가는 법정’이나 ‘찾아가는 영상법정’을 실시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청각의 감퇴나 이해능력의 저하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고령자를 위해 법원에서 실시간 문자통역을 제공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재판부가 문자 통역을 할 속기사를 지정하거나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법정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어려운 법률 용어나 재판의 절차적·실체적 내용을 쉽게 풀어 설명한다면 고령자의 이해를 도울 것이란 분석이다.
싱가포르 법원은 2017년부터 실시간으로 법원 심리를 기록할 수 있는 ‘지능형 법원 속기 시스템’을 개발해 재판에 활용하고 있다. 법관은 물론 당사자들이 법정에서 이뤄진 구두 증언을 즉시 검토할 수 있으며, 당사자가 원할 경우 법원의 승인을 거쳐 법정 절차의 오디오 녹음 사본이나 녹취록 사본을 제공받을 수 있다.
고령 피고인에 대한 보조인 요건이 완화돼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피고인 또는 피의자의 법정대리인, 배우자, 직계가족일 경우 보조인으로서 피고인(피의자)의 방어권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한 소송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령 피고인에게 장기간 소통이 없는 이른바 ‘무늬만 가족·친족’이 있을 경우, 오히려 밀접한 신뢰관계가 형성된 이웃 주민이나 친구, 요양보호사 등이 보조인이 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친족이 아닌 경우에도 법원의 허가를 받으면 보조인이 될 수 있도록 규정을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령자가 피해자 또는 증인일 경우에는 피해자 진술권이 효과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증인지원 제도나 신뢰관계인 제도가 운영돼야 한다고 보고서는 강조했다.
디지털 정보 활용에 취약한 고령자를 위한 온라인 사법접근권 제고 방안도 제시됐다. 법정대리인 없이 소송을 수행하는 이른바 ‘나홀로소송’일 경우 안내 홈페이지를 보다 고령자 친화적으로 개선하고, 법원의 온라인 법률정보서비스 콘텐츠도 고령자의 눈높이에 맞춰 제공돼야 한다. 또 로스쿨 재학생이나 청년변호사 등과의 협력을 통해 고령자의 온라인 법률 정보 접근성 개선을 도모해야 한다고 짚었다.
아울러 대법원 예규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법지원 사항 관련 조항을 제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고령자 등 사회적 약자 전반에 대한 사법지원 의무 및 절차에 규범력을 부여하고 법원별 서비스 제공 편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다. 일본은 2004년 ‘종합법률지원법’을 제정해 사회적 약자에게 균등하고 종합적인 사법지원을 제공할 근거 법령을 마련했다. 해당 법률을 바탕으로 ‘일본사법지원센터’를 설립했으며 인지기능이 저하된 고령자 등에게 무료 출장상담 기회와 법률구조 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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