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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우리생물] 숨은 사냥꾼, 자주땅귀개의 포충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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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9-04 23:03:55 수정 : 2025-09-04 23: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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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부터 가을까지 햇빛이 반짝이며 일렁이는 습지의 물가. 그 고요한 수면 아래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사냥꾼이 숨어 있다. 자줏빛 꽃을 피우며 꽃이 지고 나면 열매를 덮는 꽃받침이 귀이개처럼 길쭉하게 남아 ‘자주땅귀개(Utricularia yakusimensis Masam.)’라고 불리는 작은 식충식물이다.

 

자주땅귀개는 통발과에 속하는 식물로, 습지에서 살아가며 땅속의 미세한 생물을 잡아먹는데 키는 8㎝ 남짓에 불과하다. 뿌리 대신 흰색의 가느다란 줄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그 끝마다 ‘포충낭’이라 불리는 작은 사냥 주머니가 달려 있다. 일반적인 식충식물이 눈에 띄는 잎이나 덫으로 곤충을 유인하는 것과 달리, 자주땅귀개는 지면 아래에서 조용히 사냥을 펼친다. 이때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포충낭’이다.

 

자주땅귀개의 포충낭은 입구(Trap door), 내부 음압 공간, 소화샘(Digestive glands)으로 구성된 능동적 흡입형 덫(active suction trap)이다. 진공청소기처럼 체내의 압력을 낮춰 놓았다가 작은 유충이나 원생동물 등 먹잇감이 입구의 감각털을 건드리면 입구가 열리며 순식간에 ‘쏙’ 빨아들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먹이가 입구에 닿는 순간, 낮은 압력에 의해 물과 함께 먹이가 단숨에 빨려 들어가는데 이 모든 과정이 단 0.002초 만에 이루어진다.

 

이후 포충낭 속 소화샘이 먹이를 분해하는 동시에 항균 물질을 분비해 먹잇감의 부패를 막는다. 덕분에 먹이는 오랫동안 보관되며 천천히 소화된다. 이러한 독특한 사냥과 섭식 방식은 자주땅귀개의 생식 환경과 밀접하다. 대부분의 통발과 식물은 물속에서 작은 갑각류를 잡아먹고 살지만, 자주땅귀개는 습지나 얕은 물웅덩이의 땅속에 사는 원생동물과 유충 등을 포획하도록 진화했다. 이는 영양분이 부족한 습지에서 살아남는 데 큰 힘이 된다.

 

자주땅귀개는 국제적으로 널리 분포하지만, 국내에서는 습지가 메워지고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한라산 습지 정도만이 가장 큰 자생지로 남아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부터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자주땅귀개의 사냥 방식은 인간의 기술로도 흉내 내기 어려운 정밀함과 속도를 보여준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식물 하나가 지닌 놀라운 생존 전략은 생태계의 섬세한 조화를 다시금 일깨워 준다. 우리가 이 조용한 사냥꾼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의 터전인 습지를 지켜낸다면, 자주땅귀개는 앞으로도 우리 자연 속에서 묵묵히 생명의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정은희 국립생물자원관 환경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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