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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상처 주고 상처 받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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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9-04 23:04:00 수정 : 2025-09-04 23: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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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금실 자랑하는 부부
부모 사이 질투하는 외아들
연중 한 번 생일식사도 거부
가족이니까 감내하는 수밖에

윌리엄 트레버 ‘티머시의 생일’(‘비 온 뒤’에 수록, 정영목 옮김, 한겨레출판)

외출했다 집에 오는 길에 시장에 들렀다. 싱싱해 보이기에 무화과 한 상자를 샀다. 공연히 산 듯하지만 실은 아버지 생각을 한 것이다. 일찍 고향을 떠난 아버지는 어린 자신을 돌봐준 외할머니집 동네에 무화과나무들이 많아 여름이면 주렁주렁 열린 열매를 그냥 따먹었다고 한다. 그 향수 때문인지 무화과를 좋아하는데, 그렇다는 사실을 아는 자식은 한집에 사는 나밖에 없는 듯하다. 며칠 전에는 어머니는 절대 사지 않을 비싸고 커다란 복숭아를 사다 식탁에 올려뒀다. 여름내 부모에게 소홀했다는 자책, 혼자만 좋은 걸 먹고 다닌 미안함에서인지. 내 부모는 예전에 그리 사이좋은 편이 아니어서 가슴 졸인 날이 많았는데도 늘 마음에 걸리는 이유가 뭘까.

조경란 소설가

자식이 부모에게 갖는 감정은 몇 가지나 되는지, 자식 입장이나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 한번 분류해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가 있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티머시의 생일’을 읽곤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부모 자식 이야기를 하면서 질투라는 감정에 대해 다룬 작품이 있었던가? 외아들이 사이가 너무 좋은 부모를 질투해서 비롯되는 이야기.

오늘 4월 23일 목요일은 외아들인 티머시의 생일이며, 15년 전 티머시가 집을 떠난 후로 이 가족이 만나 유일하게 점심을 함께하는 날이다. 모든 음식과 술은 티머시가 좋아하는 종류로 준비했고, 지금 샬럿은 로즈메리를 넣은 양고기를 굽고 있다. 오두는 응접실에서 불을 피우고. 60대 부부인 그들은 “결혼 생활 42년 동안 서로 거의 떨어진 적이 없었다”. 오두는 샬럿 때문에 화가 난 적이 없고 샬럿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이 초라하다는 걸 알아도 오두와의 사랑이 생의 어떤 황량함조차 건너가게 할 것임을 아는 사람이다. 자기들 모습이 외아들에게는 “평생에 걸친 사랑의 찬양”이라는 비꼼으로, 질투로 느껴지는 줄은 알지 못한 채.

부모가 아들의 생일 점심을 준비하는 사이, 이제 시점은 서른세 살 아들로 옮겨간다. 티머시는 부모가 인정하기 어려워한 “생활 방식”을 가졌고 그 결과로 아파트와 땅을 물려받았다. 더는 낡고 오래된, 자신에게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부모가 자신에게 “좌절한 곳에서 성공해주기를 바라는”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졌다. 그러나 부모가 오늘 자신을 기다린다는 사실도 무시하기 어렵다. 무슨 핑계를 댈 수 있을까. 게다가 집에는 전화도 없는데. 그는 말 상대이자 보기에 따라서는 하인인 에디에게 부탁한다. “가서 말해줄래, 내가 몸이 안 좋다고?”

윌리엄 트레버는 전지적 시점이 모든 걸 아는 목소리가 아니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결정해야 하는 목소리라고 잘 알고 있으므로 에디에 대해 충분히 보여주지 않는다. 호기심이 생긴 에디는 티머시가 말한 그런 부모가 사는 오래된 집, 아들의 방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집, 그러니까 자신은 한 번도 가져볼 수 없는 것들로 둘러싸인 집의 문을 두드렸다. 오두는 에디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진실을 알아버렸지만, 사람을 환대하고야 마는 샬럿은 에디를 아들 자리에 앉혔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에디가 떠난 후 부부는 비가 그친 정원을 함께 걸었다. 군데군데 버려진 땅이 돼버린 땅을. 그 모습이 꼭 그들 같다는 느낌이 독자에게 들 때쯤 부부는 이런 생각을 한다. 오늘 티머시가 오지 않은 것도, 낯선 젊은이가 은붙이를 훔쳐 간 것도 자신들이 일종의 벌을 받은 거에 가까운 일이라고. 곁을 떠나버린 아들에게 계속 실망했고 사실 오두는 혐오감까지 느낀 적이 있기에. 부부는 자신들이 상처받은 게 아니라 그들이 아들에게 상처를 준 거라고 오늘 깨달았다. 아들이 자신들에게 느끼는 “잔인하게 피어나고 만 질투”는 자신들이 자초했을 수도 있단 것을. 서로의 아픔은 가시지 않겠지만 부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며 “그 또한 있는 것의 일부”이기에.

윌리엄 트레버는 인물도 독자도 쉽게 위로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엔딩에서 시작과는 다른 평정과 균형을 만들어낸다. 상처를 살아냄으로써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가족이기에.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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