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진짜 직업/ 나심 엘 카블리/ 이나래 옮김/ 현암사/ 1만8000원
1632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근대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의 직업은 렌즈 세공사였다. 렌즈를 연마해서 정확하게 가공하는 것은 단순한 손재주뿐 아니라 깊은 주의력과 차분한 인내심까지 필요한 일이다. 인간과 세상의 깊은 이치를 탐구해 섬세하게 이론을 정립해야 하는 철학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렌즈를 통해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는 데 집중했고, 그 행위는 그의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제시했고 신과 자연, 실체를 동일시하는 이른바 범신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철학은 배고픈 학문’이라는 말이 있다. 극소수의 철학자는 철학 교수로 일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19세기 이후부터의 일이다. 다른 대부분의 철학자는 무엇을 하며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을까. 철학 교사이자 박사인 저자는 철학자들의 화려한 업적 뒤에 숨겨진 직업인으로서 면모를 탐구했다. 철학자들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했던 일들은 단지 돈을 버는 수단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사상과 철학에도 고스란히 녹아 들어갔다. 저자는 고대 로마 시대에 살았던 세네카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나치 활동에 앞장선 현대 여성 철학자 시몬 베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자 40명의 직업을 소개한다.
철학자들의 시대와 사상, 학파가 제각각인 것처럼 그들의 직업도 가지각색이다. 섬세함과 논리력을 요구하는 해부학자, 수학자, 변호사, 판사 같은 직업부터 프로 사이클 선수, 재즈 피아니스트, 오토바이 정비사 등 신체적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직업도 있다. 위조화폐 제작자나 은행 강도, 코미디언, 조세 청부업자, 노예 등 철학자의 통념과 완전히 벗어나는 직업 이야기도 펼쳐진다. 다양한 직업이 어떤 방식으로 철학 세계와 연결돼 있는지 짚어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철학자들의 경제·사회 활동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을 넘어 그들의 삶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고, 그들의 철학 사상 자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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