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나가사키선 보존 대신 재건
제국주의 반성과 성찰 빠진 채
‘피폭국’만 부각 행보 이뿐인가
“위잉∼.”
취재 차 일본 규슈 서쪽 나가사키에 가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종종 듣는 긴급대응차량 사이렌과는 다른 생경한 소리가, 끊기지 않고 길게 이어졌다. 건물이 흔들린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도대체 뭘까. 최근 태평양 연안에 발령됐던 쓰나미(지진해일) 특보, 나가사키에서 발생한 규모 4.7 지진이 떠올라 다소 긴장이 됐다.

이내 그날이 8월6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80년 전 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이다. 취재 차 외출하면서 숙소 직원에게 “방금 전 사이렌 소리는 뭐였냐”고 물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시간(8시15분)이었거든요.” 사흘 뒤면 나가사키 피폭 시간인 오전 11시2분에 맞춰 또 한 번 추모의 사이렌이 1분간 울릴 터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8월 미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다. 폭심지(爆心地·폭탄이 터진 곳) 주변은 순간 잿더미로 변했고 20만명 넘게 목숨을 잃었다. 일제강점기 강제로 연행되거나 생계를 위해 현해탄을 건너와 살고 있었던 한반도 출신 3만여 명의 생도 멈춰 버렸다. 나가사키 원폭 6일 뒤 히로히토 일왕은 항복을 선언했다.
나가사키에는 현재 나라, 가마쿠라 대불(大佛)에 버금가는 크기로 제작한 청동 평화기념상을 중심으로 평화공원이 조성돼 있다. 피폭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원폭 돔과 위령비, 평화의 문을 잇는 일직선 축을 중심으로 추도관, 자료관 등이 배치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과 대조적이다. 후쿠마 요시아키 리쓰메이칸대 교수가 쓴 책 ‘전후 일본, 기억의 역학’에 따르면, 원폭 투하 후 거대한 폐허로 변한 우라카미 성당 잔해를 보존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원폭의 비참함을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고액의 (나가사키)시 예산을 들여서까지 남길 필요는 없다”는 반론에 부딪혔다. 성당은 1959년 재건됐고 불에 그을린 벽 일부만 폭심지 공원으로 옮겨졌다.
시인 야마다 간은 이를 두고 훗날 “전쟁의 참혹한 극점으로 계속해서 규정해왔던 우라카미 성당을 ‘적절하지 않다’며 말소하는 사상은 나라를 초토로 만든 책임을 탐색하지 않고 끝내버린 그야말로 일본적인 책임의 행방불명”이라고 규탄했다고 한다.
일본의 선택적 기억은 이뿐일까. 9일 나가사키 평화기념상 앞에서 열린 원폭 희생자 위령 평화기념식.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에서 피폭된 고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남긴, ‘바라건대 이 우라카미가 세계 최후의 원자 벌판이 되게 해주소서’라는 말을 인용하며 ‘핵전쟁 없는 세계’, ‘핵무기 없는 세계’를 호소했다.
물론 더없이 소중한 가치다. 러시아와 이스라엘이 각각 수년째 벌이고 있는 두 개의 전쟁과 최근 인도·파키스탄 간 무력 충돌 등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모두 핵보유국 또는 사실상 핵보유국이 개입돼 있다. 한반도 주변 안보 상황도 엄중하다. 북한은 핵 능력을 계속 고도화하면서 러시아와의 군사적 밀착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 역사와 전쟁 책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빠진 채 ‘세계 유일 피폭국’이라는 점만 부각하는 일본의 평화 호소는 공허하다. 이시바 총리는 “전쟁의 실태와 비참함, 원자폭탄 피해의 가혹함을 결코 풍화시키지 않고 기억으로 계승해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데 그쳤다.
히로시마 원폭 돔은 우라카미 성당 잔해와 마찬가지로 흉물 취급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싸구려 감상주의이자 토지경제 관점에서도 남기기 어렵다’는 의견이 팽배했지만 끝내 보존됐다. 지금은 핵폭탄이라는 대량살상무기 사용의 참상을 보여주며 비핵화와 평화를 호소하는 상징물로 남아 있다.
지난 5일 소셜미디어 엑스(X)에는 “매년 원폭의 날이 되면 생각하는 건데, 왜 공격받은 쪽이 반성하는 거야”, “위령은 알겠는데 반성은 이상해”라는 일본어 글이 잇달아 올라왔다. ‘좋아요’가 합쳐서 20만 개나 달렸다. 도대체 무슨 반성이 있었기에…. 머리가 어질했다. 일본에서 풍화하는, 그래서 계승하고 싶은 기억은 과연 무엇인가. 이시바 총리가 “전쟁을 두 번 다시 일으키지 않기 위해” 발표에 의욕을 갖고 있다는 전후 80주년 메시지를 주시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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