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새벽에 우리가 한발 늦게 대피했으면 잠 잘 곳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무섭고 끔찍하다카이.”
21일 경남 산청군 산청읍 부리 내부마을에서 만난 김부자(85) 할머니. 그는 며칠 전 이 지역에 내린 극한호우를 다시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진다고 떨면서 말했다.

최근 닷새 동안 산청 지역에는 최대 800㎜에 가까운 ‘괴물호우’가 내렸다.
강하고 많은 비가 연일 내렸던 탓에 지반이 약해지면서 산사태가 잇따라 발생했다.
이 산사태로 산청 지역에서만 이날 이날 오후 1시 기준 10명이 숨지고 4명이 아직 실종된 상태다.
내부마을에서도 70대 노부부와 20대 여성이 목숨을 잃었다.
김 할머니는 “19살에 시집온 뒤로 계속 이 마을에 살았는데 이런 물난리는 처음”이라며 “산사태로 사망한 주민도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이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한발 늦게 대피했으면 잠 잘 곳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두근거려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예”라며 트라우마를 호소했다.


김 할머니의 아들 이상용(65)씨는 “새벽에 개가 하도 짖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 이미 온 동네가 물폭탄을 맞아 쑥대밭이 된 뒤였어요. 우리 개가 아니었으면 그 난리통에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면 섬뜩하네예”라고 말했다.
내부마을 입구에서 마을주민이 대피소로 쓰고 있는 마을회관까지는 오르막길로 300여m.
비는 그쳤지만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린 탓에 전에 없던 물줄기가 생겼다. 폭포처럼 물이 도로로 흘러 들어오면서 올라가는 길이 더 미끄러웠다.


또 산사태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듯 커다란 바위들이 도로 쪽으로 굴러와 차량 통행이 쉽지도 않았다.
게다가 도로는 군데군데 움푹 패어 있었고, 전봇대와 엄청난 나무들이 맥없이 쓰러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어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번 산사태 피해가 집중된 지역이 산사태 예방 관리‧감독 취약지역에서 제외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사전에 이 같은 피해를 예방할 수 있지 않았냐는 지적이 나온다.
산림청 등에 따르면 경남 지역을 관할하는 함양국유림관리소가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해빙기 산사태 취약지역 170곳에 대해 점검을 벌였다.

극한호우 피해가 가장 컸던 산청군은 산사태 취약지역이 34곳 포함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산사태로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산청군 산청읍 부리와 60대 여성이 실종된 단성면 방목리는 산사태 취약지역으로 지정돼 있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인근 일부 지역은 산사태 취약지역으로 지정돼 있었지만, 산사태 사고가 난 지점은 아니었다.
극한호우로 80대 남성이 실종된 산청군 신안면 외송리 산38 일대는 지난해 산림청 ‘취약지역 예비후보지’에 올랐지만, 심사에서 떨어져 관리 대상에서 빠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산사태 취약지역은 태풍이나 집중호우 시 인명‧주택‧농경지 피해가 예상되는 지역 중 산림청이 경사도‧토양‧지형‧이용 현황 등을 토대로 후보지를 정한다. 이후 지자체가 5년 주기로 실태조사를 거쳐 지정한다.
지정된 지역은 사방댐 설치나 식생 복원 등 사방 사업이 우선 시행된다. 산사태 예방 사업이 우선 이뤄지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이번 산사태 피해를 키운 데에는 ‘산사태 위기 경보’가 이원화된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산림청은 18일부터 산청 지역에 읍면 지역별로 산사태 위기 예보를 보냈으나, 산사태 예보발령 주체인 산청군은 산사태 발생 이후인 19일 낮 12시37분에 산사태 주의보를 ‘경보’로 격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산청군은 산사태 재난안전 문자도 19일 낮 12시50분에서야 군민들에게 발송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인 오후 1시50분에 전 군민 대피령을 내렸다.
산사태 주관부서인 산림청과 현장 상황을 보고 판단하는 지자체로 갈라진 위기 경보 체제가 제때 대응하지 못해 피해를 키운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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